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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등번호 특집] 18번의 전설 코파와 그의 후배 페키르

축구에서 등번호가 달리기 시작한 건 192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이전까지는 축구에 등번호 자체가 없었다. 그마저도 월드컵에서 처음 도입된 건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였다. 당시엔 고정된 등번호가 아닌 선발 출전하는 선수에게 해당 경기마다 1번부터 11번의 등번호를 달고 출전하는 형태였다.

결국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이르러서야 지금처럼 선수 고유의 등번호를 가지고 경기에 나섰다. 이를 기점으로 등번호는 제각각의 의미를 띄기 시작했다. 몇몇 선수들은 특정 등번호를 통해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월드컵 참가 선수가 22명에서 23명으로 늘어난 건 2002년 한일 월드컵부터이다. 이전까지는 22인으로 월드컵 로스터가 정해져 있었다. 즉 등번호 23번이 등장한 건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그런 관계로 골닷컴에서 제공하는 등번호 특집 칼럼에서 등번호 23번은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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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수의 경우 등번호 1번부터 11번까지는 전통에 따라 주전 선수들이 많이 다는 번호이다. 자연스럽게 12번부터는 백업들이 주로 등번호를 달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특정 스타 플레이어들 중에선 뒷번호를 더 선호하는 경우도 있고, 해당국가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번호도 있다. 혹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유망주 시절에 선배들에게 밀려 뒷번호를 달고 뛰다가 스타덤에 오르기도 한다.

18번은 일본 대표팀 선수들이 선호하는 번호다. 2002년 한일 월드컵과 2006년 독일 월드컵 땐 일본이 자랑하는 신성 오노 신지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땐 에이스 혼다 케이스케가 18번을 달고 뛰었다. 이는 일본 가부키 명가 7대손 이치가와 단쥬로가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부키 연극 중 18개의 명작을 선정했는데, 이 중 18번째 작품이 가장 인기를 끌었던 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이후 일본에서 18번은 애창곡 내지는 최고라는 의미를 가지게 됐고,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투수 에이스가 18번을 다는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다.

축구 팬들 사이에서 18번은 칠레의 전설적인 공격수 이반 사모라노의 번호로 알려져 있다. 원래 사모라노는 이탈리아 세리에A 명문팀 인테르의 9번이었으나 브라질 축구황제 호나우두가 바르셀로나에서 인테르로 이적해 오면서 등번호 9번을 뺏기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그는 18번으로 갈아타면서 '1'과 '8' 사이에 '+'를 삽입했다. 즉 '1+8=9'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후 많은 공격수들이 18번을 다는 습성이 있다.

World Cup Back Number


# 등번호 18번의 전설 코파과 그의 후배 페키르

프랑스에게도 등번호 18번은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로 아트 사커의 첫 전성기를 연 프랑스 축구의 선구자 레이몽 코파의 등번호가 바로 18번이었기 때문. 축구 선수로는 최초로 1970년, 프랑스 대통령이 수여하는 레지옹 도뇌르훈장을 받은 그는 169cm의 단신이지만 빠른 스피드에 기반한 드리블 돌파와 정교한 패스 능력으로 명성을 떨쳤다. 

1952년, 만 20세의 나이에 프랑스 대표팀에 승선한 그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참가했다. 비록 당시 프랑스는 유고슬라비아와의 개막전에서 0-1로 패하면서 8강 진출에 실패했으나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2-2 동점 상황에서 경기 종료 2분을 남기고 차분하게 페널티 킥으로 결승골을 넣으며 3-2 승리를 이끌었다.

소속팀 스타드 드 랭스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빠른 속도로 기량을 끌어올린 그는 1955년, 스페인과의 평가전에서 골을 넣으며 2-1 승리를 견인해 스페인 일간지 '마르카'로부터 '작은 나폴레옹'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이어서 1956년 6월 13일, 초대 챔피언스 리그(참고로 당시 대회 명칭은 유러피언 컵이었다) 우승팀을 가리는 레알 마드리드와의 결승전에서 맹활약을 펼쳤으나 3-4로 아쉽게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코파의 활약에 깊은 인상을 받은 레알은 1956년 여름, 그를 영입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유러피언 컵 초대 챔피언 레알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페렝 푸스카스, 코파, 프란시스코 헨토를 중심으로 황금기를 구가하며 유러피언 컵 5연패와 함께 유럽 최강자로 군림했다.

Raymond Kopa Richelieu

자연스럽게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프랑스 국민들의 시선은 코파에게로 집중됐다. 그는 랭스 시절 영혼의 콤비로 불렸던 공격수 쥐스트 퐁텐과 함께 연신 득점포를 합작해내며 공격을 이끌었다. 실제 퐁텐은 무려 13골을 넣으며 월드컵 역사상 단일 대회 최다 골 기록을 수립했다. 코파는 3골에 더해 9도움을 올리며 퐁텐을 지원사격했다.

비록 프랑스는 펠레의 브라질에게 준결승전에서 2-5로 대패했으나 서독과의 3, 4위 결정전에서 6-3 완승을 거두며 3위를 차지했다. 당시로서는 프랑스 역대 최고 성적에 해당한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그는 대표팀 동료 퐁텐과 서독 에이스 헬무트 란을 제치고 유럽 최고의 선수에게 수여하는 발롱 도르를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1962년 칠레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고, 결국 코파 역시 1962년 11월, 헝가리와의 평가전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을 떠났다. 코파는 선수 은퇴 후 애칭에 걸맞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고향 코르시카로 이주해 황혼기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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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프랑스는 월드컵 무대에서 이렇다할 힘을 쓰지 못하면서 힘든 시기를 보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본선 진출 이후 2개 대회 연속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다행히 코파의 후계자인 측면 미드필더 도미니크 로셰투가 등번호 18번을 물려받으면서 프랑스는 다시금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고, 1982년 스페인 월드컵 4위에 이어 1986년 멕시코 월드컵 3위까지 차지하며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 중심엔 프랑스 축구대통령 미셸 플라티니가 있었으나 로셰투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월드컵에서 프랑스 18번의 주인공은 나빌 페키르로 낙점됐다. 코파가 폴란드계(코파의 실제 풀네임은 코파셰프스키다)인 것처럼 페키르는 알제리계이고, 그 역시 코파처럼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와 측면 미드필더롤 동시에 소화할 수 있다. 아직 위대했던 코파에게 비할 바는 아니지만 페키르 역시 빠른 스피드와 정교한 기술에 더해 득점력까지 보유하고 있다.

특히 페키르는 유로 2016을 앞두고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끔찍한 부상을 당해 2015/16 시즌, 소속팀 리옹에서 프랑스 리그 앙 9경기에 출전해 4골에 그쳤으나 2016/17 시즌 9골에 이어 2017/18 시즌 무려 18골을 넣으며 상승세를 타고 있다. 이러한 활약상을 인정받아 그는 리버풀로부터 강력한 러브콜을 얻고 있고, 아직 확실한 주전군에 포함된 건 아니지만 서서히 대표팀 내에서도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특히 그는 지난 5월 30일, 아일랜드와의 경기에서 골을 넣으며 2-0 승리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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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3일, 프랑스는 큰 별을 잃었다. 바로 코파가 만 8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 이에 노엘 르 그라트 프랑스 축구협회장은 "프랑스 축구계에 있어 매우 슬픈 소식이다. 코파는 전설 중에서도 전설이었다. 그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 모두가 생전 그의 모습과 역사를 추억으로 남겨둘 것이다"라며 애도를 표했다. 프랑스 리그 앙 구단들은 물론 레알 마드리드 역시 그를 추모했다. 

이번 러시아 월드컵은 프랑스 입장에서 코파가 사망하고 처음으로 치르는 메이저 대회이다. 당연히 프랑스는 코파에게 우승 트로피를 선사하고 싶어할 것이 분명하다.

다만 프랑스는 1998년 자국 월드컵 우승을 제외하면 원정에서 단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한 적이 없다. 게다가 프랑스가 자랑하는 찬스메이커 디미트리 파예는 부상으로 낙마했고, 핵심 미드필더 폴 포그바는 평가전에서 연달아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면서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코파의 등번호를 계승한 페키르가 프랑스에 새로운 개성을 더해줄 필요가 있다.

Nabil Fek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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