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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그라보브스키-횔첸바인' 프랑크푸르트 역대 베스트 일레븐은?

프랑크푸르트는 한국이 자랑하는 전설적인 공격수 차범근의 소속팀으로 국내 축구팬들에게도 친숙한 팀이다. 비록 분데스리가에선 단 한 번의 우승도 없지만 독일의 FA컵에 해당하는 DFB 포칼에서 5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바이에른 뮌헨(19회)과 베르더 브레멘(6회)에 이어 샬케와 함께 공동 3위에 위치하고 있다. 2017/18 시즌 역시 프랑크푸르트는 독일 최강 바이에른을 3-1로 꺾고 우승을 달성했다. 전형적인 컵대회 강호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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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프랑크푸르트에 전성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1970년대 위르겐 그라보브스키와 베른트 횔첸바인, 칼-하인츠 쾨르벨, 베른트 니켈 같은 재능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면서 프랑크푸르트는 1973/74 시즌과 1974/75 시즌에 포칼 2연패를 달성하면서 황금기를 보냈다. 이에 더해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브루노 페차이와 차범근 같은 뛰어난 외국인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1979/80 시즌 UEFA컵(유로파 리그 전신) 우승과 1980/81 시즌 포칼 우승을 연달아 차지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프랑크푸르트는 우베 바인과 랄프 팔켄마이어 같은 선수들의 활약 덕에 분데스리가 3위에서 5위 사이를 오가면서 상위권을 유지했다. 하지만 이들마저 떠나면서 1996/97 시즌,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2부 리가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고, 이후 2011/12 시즌까지 분데스리가와 2부 리가를 오가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프랑크푸르트는 2012/13 시즌 분데스리가 승격과 동시에 6위를 차지하면서 유로파 리그 진출권을 획득했고, 이후 꾸준하게 성적을 올리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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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 오카 니콜로프

프랑크푸르트는 독일 구단들 중에선 유난히 골키퍼와는 인연이 없는 편에 속한다. 울리히 슈타인과 안드레아스 쾨프케, 그리고 현재 팀의 골문을 지키고 있는 케빈 트랍이 독일 대표팀에 승선했으나 이들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오랜 기간 뛰었던 게 아니다. 니콜로프는 분명 스타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2부 리가에서 뛴 경력도 6시즌이나 있다. 하지만 그는 프랑크푸르트 유스 출신으로 무려 18년을 프랑크푸르트에서 뛰면서 팀이 2부 리가로 강등됐을 때도 남아서 헌신했다. 그가 있는 동안 프랑크푸르트는 무려 4번이나 강등되는 아픔을 맛보았으나 그의 공헌 덕에 4번을 다시 분데스리가 무대로 승격할 수 있었다. 공식 대회 출전 경기 수도 415경기로 프랑크푸르트 역대 골키퍼들 중에선 독보적인 수치를 자랑하고 있다(2위는 슈타인으로 276경기). 이것이 그가 현재까지도 프랑크푸르트 팬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이다. 참고로 그는 페널티 킥 선방율에서 43.2%를 자랑하면서 페널티 킥 킬러로 명성을 떨쳤다.


CB 만프레드 빈츠

프랑크푸르트 유스 출신 수비수로 1985년에 프로 데뷔해 프랑크푸르트가 2부 리가로 강등되기 이전이었던 1995/96 시즌까지 11년간 활약하며 팀 수비의 중추 역할을 담당했다. '리베로 마니(Manni der Libero)'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수비진 조율에 일가견이 있는 수비수였다. 이후 브레시아와 키커스 오펜바흐를 거쳐 선수 경력 말년에 프랑크푸르트 2군으로 돌아와 어린 선수들의 성장을 도왔다. 공식 대회 411경기에 출전하면서 구단 역대 수비수 부문 3위에 올라있다.


CB 브루노 페차이

빈츠 등장 이전 프랑크푸르트 황금기의 리베로. 오스트리아 역대 최고의 수비수로 꼽히는 그는 1978년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해 1979/80 시즌 UEFA컵 우승과 1980/81 시즌 포칼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물론 여전히 당시 프랑크푸르트엔 그라보브스키와 횔첸바인, 니켈, 쾨르벨 같은 전설들이 있었으나 공격의 차범근과 수비의 페차이가 가세했기에 황금기의 마지막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뛴 기간은 5시즌 밖에 안 되지만 프랑크푸르트 역대 최고의 수비수로 쾨르벨과 함께 거론될 정도로 그의 활약상은 완벽 그 자체였다.


CB 칼-하인츠 쾨르벨

찰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프랑크푸르트 역대 최고의 수비 대장. 1972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데뷔해 1991년까지 무려 19년 동안 프랑크푸르트에서 뛰면서 황금기의 산증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실제 그는 프랑크푸르트 선수들 중 가장 많은 트로피(포칼 3회와 UEFA컵 1회)를 자랑하고 있고, 출전 경기 수 역시 713경기로 독보적인 1위를 달리고 있다(2위는 그라보브스키 516경기). 심지어 분데스리가만 놓고 보더라도 그는 602경기로 프랑크푸르트를 넘어 분데스리가 역대 최다 출전을 자랑하고 있다(2위는 함부르크 전설 만프레드 칼츠의 581경기). 그가 없이는 프랑크푸르트의 수비를 논할 수 없다.


RM 위르겐 그라보브스키

프랑크푸르트 원클럽맨이자 구단 역대 최고의 선수로 추앙받는 전설. 프랑크푸르트에선 그에 대한 찬가가 있을 정도로 사실상 종교와도 같은 위상을 가진 선수다. 1965년에 프랑크푸르트 1군에 입단해 1980년 은퇴할 때까지 분데스리가 최정상급 선수로 활약했다. 독일을 대표하는 멀티 플레이어로 선수 생활 초기엔 공격수였으나 공격형 미드필더와 측면 공격수로 서서히 내려왔고, 선수 생활 말년엔 중앙 미드필더로 변신하면서 정상급 기량을 오랜 기간 유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는 축구 선수로는 황혼기에 해당하는 만 35세의 나이(1979/80 시즌)에도 매경기 풀타임을 뛰면서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했다. 하지만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와의 분데스리가 25라운드에서 당시 신인이었던 로타르 마테우스의 거친 태클에 큰 부상을 당해 안타깝게 은퇴 수순을 밟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프랑크푸르트는 UEFA컵 결승전에서 마테우스의 묀헨글라드바흐를 꺾고 구단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유럽 대항전 우승을 차지하면서 은퇴하는 그라보브스키에게 큰 선물을 선사했다는 데에 있다. 프랑크푸르트 구단 역대 최다 출전 2위(516경기)이자 최다 도움 기록자(74도움)이며, 최다 득점에도 4위(127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독일 대표팀에서도 중추로 활약하면서 유로 1972와 1974년 서독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다.


CM 베른트 니켈

프랑크푸르트가 자랑하는 중앙 미드필더. 프랑크푸르트 유스 출신으로 1968년 프로 데뷔해 1983년까지 15년간 활약하면서 정상급 미드필더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그는 '해머 박사(Doktor Hammer)'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강력하면서도 정교한 왼발 킥을 자랑했다. 심지어 코너킥에서 왼발 킥으로 4골을 넣었을 정도다(이는 분데스리가 역대 최다에 해당한다. 코너킥 직접골 2위는 베르더 브레멘과 바이에른 뮌헨에서 활약했던 마리오 바슬러로 3골). 이러한 킥을 바탕으로 그는 공격수가 아니었음에도 프랑크푸르트 구단 역대 최다 골 2위(162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출전 경기 수는 514경기로 구단 역대 3위.


CM 우베 바인

독일 팬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역대 가장 기술적으로 뛰어난 미드필더 중 한 명이었다는 칭송을 듣고 있는 선수. 사실 그는 어느 한 곳의 레전드라고 칭하기엔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다. 키커스 오펜바흐에서 프로 데뷔해 쾰른을 거쳐 함부르크에서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1989년,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해 5시즌 동안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후 J리그 강호 우라와 레즈로 이적해 선수 생활의 말년을 보냈다. 그래도 그가 가장 오랜 많은 경기에 출전한 구단은 다름 아닌 프랑크푸르트이다. 그는 5시즌 동안 프랑크푸르트에서 182경기에 출전해 46골 63도움을 올리면서 90년대 초반 전성기를 이끌어냈다. 63도움은 그라보브스키에 이어 구단 역대 최다 도움 2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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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M 빌리 노이베르거

왼쪽 측면 스페셜리스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베르더 브레멘, 부퍼탈러를 거쳐 1974년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했다. 이후 그는 1983년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활약하면서 황금기의 중추 역할을 담당했다. 주로 왼쪽 측면 수비수로 뛰었으나 공식 대회 통산 629경기에 출전해 82골을 넣으면서(프랑크푸르트 소속으로는 336경기 25골) 공격력을 과시했다. 현재는 분데스리가 역대 최다 출전 8위(520경기, 프랑크푸르트 소속으로는 267경기)지만 쾨르벨에 의해 해당 기록이 깨지기 이전까지 분데스리가 역대 최초로 500경기를 넘긴 최다 출전 기록자였다.


RW 차범근

한국 축구를 넘어 아시아 축구의 영원한 영웅. 아시아인의 유럽 축구 진출에 있어 선구자 역할을 담당했다. 외국인 선수 영입이 흔치 않았던 시절, 군복무를 마치고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한 그는 데뷔 시즌부터 두 자릿 수 골(12골)을 넣었고, 무엇보다도 프랑크푸르트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럽대항전 우승(UEFA컵)을 견인했다. 2년 차엔 바이엘 레버쿠젠 수비수 위르겐 겔스도르프의 거친 파울에 허리 부상을 당했음에도 포칼 결승전에서 골을 넣으며 또다시 우승을 이끌어냈다. 이런 점이 그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단 4시즌 밖에 뛰지 않았음에도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으로 뽑히는 이유이다. 이후 그는 레버쿠젠에서 6시즌을 더 뛰면서 당시 분데스리가 역대 외국인 선수 최다 골(98골) 기록을 수립했다. 물론 레버쿠젠에서도 위대한 업적을 세웠으나 많은 독일인들은 차범근하면 프랑크푸르트 시절을 기억한다. 그 정도로 프랑크푸르트에서의 그는 분데스리가 최정상급 공격수였다.


CF 토니 예보아

가나 역대 최고의 공격수로 추앙받고 있는 선수. 독일 2부 리가 구단 자브뤼켄에서 유럽 무대 출발을 알린 그는 1990년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해 데뷔 시즌부터 공식 대회 두 자릿 수 골(11골, 분데스리가는 8골)을 넣으면서 성공적인 출발을 알렸다. 이후 2년 차에 분데스리가에서만 15골을 넣은 그는 1992/93 시즌 20골(27경기)을 기록한 데 이어 1993/94 시즌에도 부상으로 22경기 출전에 그쳤음에도 18골을 넣으면서 2시즌 연속 득점왕을 차지하는 괴력을 과시했다. 1994/95 시즌 전반기 14경기에 출전한 그는 7골을 넣고 겨울 이적시장을 통해 리즈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이로 인해 4년 6개월의 짧은 기간을 프랑크푸르트에서 뛰었으나 그는 공식 대회 156경기에 출전해 89골 28도움을 올리면서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LW 베른트 횔첸바인

그라보브스키와 함께 프랑크푸르트 역대 최고의 선수로 뽑히는 공격수. 무엇보다도 그는 1974년 월드컵 결승전 당시 동점골로 연결된 페널티 킥을 얻어내면서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해 독일에게 우승을 선사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최전방과 측면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공격수로 1967년 프로 데뷔해 1981년까지 14년을 프랑크푸르트에서 뛰면서 통산 502경기(역대 4위) 201골로 구단에서 유일하게 200골 고지를 넘어섰다. 비록 득점왕을 차지한 적은 없지만 14시즌 중 10시즌을 두 자릿 수 득점을 기록했고, 특히 1976/77 시즌엔 26골을 넣으면서 득점 3위에 올라섰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에도 그는 만 35세의 나이에 11골을 넣으면서 정정함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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