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닷컴] 한만성 기자 = 미하일 이바노비치 안(Mikhail Ivanovich An).
평범한 한국인에게는 듣기만 해도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름이지만, 미하일 안은 1970년대 유럽 무대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100% 한국인 혈통의 '고려인' 미드필더였다. 과거 아리랑TV, KBS 등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고려인 축구 레전드 미하일 안의 일대기를 재조명한 적은 있었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70년대 유럽의 강호 구소련을 호령한 그를 자세히 알지 못하거나 아예 모르고 있다. 그러나 재미교포 2세 영화감독 브라이언 송이 제작한 미하일 안의 인생 스토리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미샤(Misha)>가 최근 공개되며 관심을 끌고 있다.
<미샤>를 통해 공개된 당시 소련 선수들은 미하일 안은 안드레아 피를로를 연상케 하는 선수였다고 말한다. 미샤의 활약상을 담은 몇 안 되는 영상을 확인해보면, 실제로 그는 중원에서 볼을 받아 공격 진영으로 찔러주는 날카로운 중장거리 패스가 돋보이는 플레이메이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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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an Song[사진] 1972년 미하일 안과 그의 파흐타코르 동료들
지난 1952년 구소련 영토였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태어난 한국인 3세 미하일 안은 단 17세의 나이에 소련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된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그는 당시 소련 리그의 복병으로 떠오른 파흐타코르 타슈켄트에서도 9년간 주장으로 활약했으며 1978년 소련 성인 대표팀에 발탁돼 EURO 1980 예선 무대에서 두 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미하일 안은 1979년 부상을 안고 있어 출전할 수 없었던 원정 경기를 앞두고 주장으로서 팀동료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탑승한 비행기가 공중 충돌 사고를 당하며 비극적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미하일 안은 사실상 소련에서 태어나 소련에서 자라며 축구 선수가 된, 한국어도 할 줄 모르는 '무늬만 한국인'인 러시아인에 더 가까운 인물로 국내에 알려졌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미샤' 제작을 위해 약 5년에 걸쳐 우즈베키스탄을 오가며 미하일 안의 가족과 만난 브라이언 송 감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브라이언 송은 '골닷컴 코리아'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미하일 안이 해외에 살고 있는 여느 한국인 이민 가정과 다를 게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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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자라지 않았을 뿐, 미샤(미하일 안의 애칭)는 한국어를 곧잘했다. 그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즈베키스탄으로 쫓겨난 사람들이었고, 한국어밖에 할 줄 몰랐다. 내가 만난 미샤의 친형 드미트리 역시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대화했다. 미샤는 우리와 비슷한 인생을 살았던 한국인이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능력을 인정받기 전까지는 인종차별을 겪어야 했고, 이를 딛고 성공했다. 미샤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여전히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을 정도다. 우즈베키스탄은 최근 10년간 월드컵 진출에 근접했으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지 못해 본선행을 이루지 못했다. 우즈베키스탄은 미샤가 당한 비행기 사고로 자국 최고 명문 파흐타코르 타슈켄트의 선수단 전원이 사망했다. 자국 축구를 이끌던 한 세대를 한꺼번에 잃은 셈이다. 우즈베키스탄 축구는 당시 한 세대를 잃은 후 최근이 돼서야 회복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을 다섯 차례나 방문한 브라이언 송의 취재 결과 미하일 안의 조부모는 일제 강점기 당시 함흥시에서 가장 척박한 환경에서 살던 조선인이었다. 굶주림에 지친 그들에게는 후손에게 물려줄 만한 새로운 환경이 필요했다. 결국, 그들은 한반도를 떠나 소련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2차대전 당시 악명 높았던 소련의 스탈린 독재 정권은 레닌그라드 지역에 자리를 잡은 고려인들을 성가시게 여겼고, 그들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으로 쫓아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8~90년대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신 적이 있다. 성공을 하시진 못했지만...(웃음) 당시 아버지가 라시아 쪽 고객들을 대상으로 행사를 열었는데, 우즈베키스탄에서 활동하는 한국 무용단을 보게 됐다. 그때는 우즈베키스탄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다. 솔직히 '왜 그런 곳에 한국 사람이 있지?'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때 어머니가 내게 '네가 영어를 하면서 미국에 살고 있는 것처럼 그냥 러시아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고, 러시아어를 할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시간이 지나며 늘 멕시코, 브라질, 쿠바, 스페인,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한국인들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미하일 안이라는 축구 선수에 대해 알게 됐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 팬이었다. 미하일 안의 인생 스토리가 웬지 모르게 내게는 매혹적으로 다가온 게 사실이다."
Brian Song[사진] 브라이언 송 감독
브라이언 송 감독은 40년 전, 훨씬 더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미하일 안에 대해 알게 되며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막연한 호기심이 생겼다고 밝혔다. 해외에서 태어나자란 재미교포 2세 브라이언 송 감독 또한 미하일 안의 스토리를 접하며 동질감을 느꼈다고 한다. <미샤>의 제작진에는 과거 미국 프로농구 NBA의 공식 방송 'NBATV' 프로듀서로도 활동한 브라이언 송 감독을 비롯해 영화 <친구>의 촬영감독 황기석, 미국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 촬영감독 피터 콘찰이 합류했으며 헐리우드 영화 <블랙버드> 촬영감독 이은하가 편집을 책임졌다. 또한, <미샤>의 내레이션은 베트남계 미국인 헐리우드 배우 키옹 심이 맡았다. 브라이언 송 감독의 본업은 광고 영상을 제작하는 CF 감독이다. <미샤> 제작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수년간 미국의 치약 시장을 장악한 크레스트, 오럴 B 등 상업광고가 그의 전문 분야였다.
"사는 곳이 한국이 아니라고 해서 한국인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세상 어디에 살고 있던 한국인 부모님 밑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추구하는 삶의 가치는 대부분 비슷하다. 한국인에게는 교육, 서로에 대한 존중을 중시하는 성향이 짙다. 미하일 안을 알게 된 시점 나는 상업 광고 제작자로 활동하며 돈을 어느 정도 모아놓은 상태였다. 이때가 5년 전이었으니 당시 나는 30대 중반이었다. 우선 우즈베키스탄에 살고 있는 한국인 이민자들과 접촉하며 취재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미샤의 친형 드미트리를 만나게 됐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나며 조사를 진행했고, 약 1년간 리서치 과정을 거쳤다. 당시 나는 생리대, 치약 광고를 만드는 반복적인 삶에 지쳐 있었다. 40대가 되기 전 모험적인 도전을 하고 싶었다."
Brian Song[사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미하일 안 거리'에서 고려인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고 있는 브라이언 송 감독
무려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한 고려인들에게 미하일 안의 존재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1년이 지난 지금까지 절대적이다. 브라이언 송의 전언에 따르면 우즈베키스탄에 살고 있는 어린 한국계 2세들은 '코리안 드림'을 품고 자란다. 이 때문에 미하일 안은 그들에게 자부심이자 안타까움의 상징이다.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미하일 안의 현역 시절 업적을 알아주고,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게 그들의 바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국에서 자라며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지만, 20세기 초반 어쩔 수 없이 소련으로 가게 되며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에게는 '코리안 드림'이 있다. 미샤가 어린 시절 자란 동네에 가면 호텔 등에서 일하는 젊은 친구 중 상당수가 젊은 고려인들이다. 그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한국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거나 '결혼은 한국에서 한국 사람과 하고 싶다'는 바람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은 정작 한국에 가면 심각한 차별과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처음 우즈베키스탄에 가서 그들과 만났을 때도 나를 경계하는 분위기가 분명히 있었다.
"미샤는 고려인들에게 영웅이다. 미샤는 고려인들에게 스포츠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준 인물이기 때문이다. 소련 대표팀 주장으로 활약한 고려인 미샤 덕분에 인종차별이 지금보다 더 심각했던 6~70년대 시절 고려인들이 소련에서 더 인정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올 초에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친구와 함께 이발소에 갔었다. 공교롭게도 이발사는 우즈베키스탄인이었다. 그는 내가 미샤에 대해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미샤는 우리의 위대한 주장'이었다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saritagraphic[그림] 이탈리아 축구 아티스트 '사리타그래픽(@saritagraphic)'이 그린 미하일 안
더 비극적인 사실은 브라이언 송 감독이 지난 4월 <미샤>의 제작 완료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는데,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미하일 안의 친형 드미트리가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다. 이제 미하일 안의 현역 시절을 기억하는 그의 가족은 남동생(이노켄티 안), 그리고 누나 세 명(베라 안, 클라프디야 안, 다리아 안)뿐이다. 미하일 안은 여전히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존재인 게 사실이다. 평생 '코리안 드림'을 품고 살아온 그의 가족이라면 이와 같은 사실을 원망스러워 할 법도 하지만(실제로 영화를 보면 미하일 안의 현역 시절을 재구성한 장면에서 그를 연기한 배우는 손자 막심 안이다.), 지난 5년간 그들을 여러 차례 만나본 브라이언 송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Brian Song[사진] 미하일 안의 손자 막심 안
"미샤의 가족은 매우 검소하다. 지금이야 국가대표급 축구 선수라면 수백만 달러를 받으며 호화로운 삶을 살지만, 미샤의 시절에는 그렇지 못했다. 당시 소련의 프로축구선수 월급은 약 50달러, 혹은 100달러 정도였다. 미샤의 가족에게는 그가 재능 있는 축구 선수였으며 고려인들에게 사랑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들은 나와 만났을 때도 미샤에 관해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내가 미샤에 대해 영화를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도 그들은 정말 기뻐했다. 그들은 내가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할 때마다 따뜻하게 환영해줬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아직 한국에서 미샤의 삶은 더 자세히 조명한 작품이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이 놀랍긴 하다. 미샤는 누군가에게 영감이 될 수 있는 스토리를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샤의 스토리는 단순한 스포츠 스토리가 아니라 역경을 딛고 성공한 인물의 이야기를 담은 휴먼 스토리다. 드미트리의 말에 따르면 미샤가 처음 파흐타코르에 입단했을 때만 해도 그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며 벤치에만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 열린 한 대회에서 어쩌다가 미샤의 활약상을 본 북유럽의 수많은 구단이 이후 그에게 영입 제안을 했고, 이를 계기로 드미트리는 '내 동생에게 가족과 생활할 아파트를 제공해주고 1군에서 뛰게 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크라이나나 모스크바로 떠날 것'이라고 통보하며 상황이 바뀌었다."
Brian Song[사진] 미하일 안과 그의 친형 드미트리 안
그렇다면 현역 시절의 미하일 안은 어떤 선수였을까? 아쉽게도 그의 활약상을 담은 영상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당시에는 당연히 전 세계 어느 축구 선수의 활약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SNS) 채널이 존재하지 않았다.
"거기다 미샤가 축구를 한 곳은 소련이었다. 당시는 소련으로 편지를 보내는 것조차 어려운 시절이었다. 만약 그 시절 소셜 미디어가 있었다면 아마 오늘날 미샤는 훨씬 더 큰 화제가 될 만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당시 소련에서는 VHS 테이프가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이 때문에 테이프가 부족하면 이미 다른 영상이 녹화된 테이프를 다시 쓰곤 했다고 한다. 미국이나 한국처럼 기록을 남기기 위해 영상 파일을 저장해놓고 자료화해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동양인이었던 미샤는 소련 선수들과 비교해 키가 작았고, 신체적으로 약한 편이었다. 특히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듯이 그는 선수 시절 초기에는 왼발을 전혀 쓸 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지나며 180cm이 넘는 꽤 건장한 미드필더로 성장했고, 북유럽에서 양발을 가장 잘 쓰는 미드필더 중 한 명이 됐다. 미샤는 말이 적은 조용한 동료였지만, 어린 나이에 주장이 됐을 정도로 리더십이 탁월했다고 한다. 과거 미샤와 함께 뛴 선수들과 얘기를 해보니 그는 운동장 안에서 팀동료들을 챙겼을 뿐만이 아니라 동료들이 가족 문제, 경제적인 문제, 사생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선수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미하일 안의 목숨을 앗아간 비행기 사고가 더 안타까운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미하일 안에게는 생전에도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데에 대해 큰 공포증이 있었다. 이 때문에 미하일 안은 사고를 당하기 훨씬 전부터 비행기에 타면 자주 원정길에 동행한 파흐타코르 수석코치의 아내 앨라 세르게에프나와 러시아 카드게임 두라크(durak)를 하며 두려움을 떨쳐냈다고 한다. 그러나 늘 파흐타코르가 원정을 떠나면 선수단과 함께 원정길에 오른 앨라는 운명의 장난처럼 1979년 우크라이나행 비행기에는 당시 개인 사정으로 몸을 싣지 않았고, 그녀의 남편과 미하일 안 등 파흐타코르 선수단을 포함해 이날 탑승한 승객 178명은 전부 사망했다. 브라이언 송의 <미샤>는 사고 후 41년이 지난 현재까지 자신의 남편과 아들 같은 파흐타코르 선수들을 갑작스럽게 잃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알라스의 인터뷰까지 담고 있다.
Brian Song[사진] 앨라 세르게에프나
"드미트리와 알라스의 말에 따르면 미샤는 늘 비행기를 타는 데 거부감이 있었다고 한다. 알라스는 미샤의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늘 비행 도중 그와 카드게임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 도중 비행기가 흔들리면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미샤는 이 사고에 앞서 미국 LA, 샌프란시스코 원정 경기를 치르며 미국, 멕시코 팀들을 상대했는데, 당시 소련에서 미국으로 가던 비행기가 심한 난기류에 휩쓸려 크게 흔들리며 가뜩이나 심했던 비행 공포증이 더 심각해졌다. 이후 그는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벨라루스, 조지아 등 원정 경기를 위해 비행기에 탈 때마다 두려움을 떨었다고 한다. 더 신기한 사실은 그가 사고를 당한 우크라이나 원정길에 오를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다. 미샤는 이날 부상 때문에 경기에 출전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주장으로서 팀 분위기를 생각해 두려움을 무릅쓰고 탄 비행기에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미샤>는 독립 영화로 제작된 만큼, 브라이언 송 감독은 앞으로 수많은 영화제(film festival)에서 자신의 작품을 소개할 계획이다. 그는 부산국제영화제 등을 통해 국내에도 미하일 안의 스토리를 알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기자는 인터뷰를 마치기 전 마지막으로 그에게 아직 국내에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미하일 안에 대해 궁금해하는 축구 팬들에게 남기고 싶은 한 마디가 있느냐고 물었다.
"우선 <미샤>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mishathedoc)을 팔로우해주셨으면 좋겠다(웃음). 우리는 단순한 스포츠 영화를 만든 게 아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휴먼 스토리를 담아 <미샤>를 만들었다. 열린 마음으로 영화를 봐준다면, 한번 보고 잊을 만한 작품은 절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영화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더 어려운 건 완성된 영화를 대중에 알리는 일이다. 딱 한 마디만 더하고 싶다. 사는 곳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한국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정서적으로 다를 수 있고, 한국어를 잘 못 하더라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비슷한 점도 많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한다."
글/인터뷰: 한만성
사진: 브라이언 송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