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닷컴] 프로스포츠의 핵심은 경쟁이다. 선수든 팬이든 자존심을 걸 이유가 뚜렷한 경기가 훨씬 흥미진진하고, 그래서 더 잘 팔린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서 경쟁 심리는 자긍심과 적개심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가끔 분노가 선을 넘어 말썽도 일으킨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백배 낫다.
4월 3일 비 내리는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수원과 전북이 만났다. 한 달 넘게 이어졌던 ‘백승호 게임’의 당사자들이다. 수원이 발끈하자 전북은 발을 뺐다. 백승호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언론플레이 스타디움’에서 수원과 백승호가 뜨겁게 맞붙었다. 잠자코 있던 전북이 마지막 순간 판을 뒤집었다. 백승호가 전북 선수로 최종 등록되면서 게임은 끝났다, 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음 날 선수 측은 장문의 입장문을 뿌렸고, 하루가 지나 수원과 전북이 그라운드 위에서 격돌했다. 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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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전 빅버드에는 각종 걸개가 등장했다. ‘없고, 없고, 없고, 없다’ 걸개를 보는 순간, 솔직히 제일 먼저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나는 불구경꾼이니까. 내게 필요한 건 팝콘이지 수원 서포터즈의 걸개 내용을 판단하는 일에 통찰이나 감정까지 동원할 의무는 없다. 제3자의 최선은 품평 정도다. ‘이건 좀 유치하군’, ‘저건 고민 좀 했네’, ‘힘내라 수원의 프론트? 직원 가족인가?’, ‘역시 걸개는 출력보다 락카 글씨가 강렬해’ 등등이다. 걸개들이 빗물에 젖어 더 비장해 보였다. 빗물에 젖은 취재진의 노트북은 환장이고. 메인스탠드 지붕에서 물이 샐 줄이야.
이날 수원의 경쟁심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수렴되었다. 서포터즈의 걸개, 왠지 소극적인 것 같은 홈팀의 통제, 아주 가끔 마스크를 뚫고 나오는 욕설 등 모든 몸짓이 원정팀을 저주했다. 그라운드 상황은 영 딴판이었다. 직접 뛰는 수원 선수들은 전북을 저주하지도 억제하지도 압도하지도 못했다. 실력, 조직력, 체력, 집중력 어느 것 하나 앞서지 못했다. 지금까지 수원 구단이 보였던 대처만 놓고 보면, 선수단도 동기부여가 충분할 것이라는 경기 전 기대감은 빗물에 전부 쓸려갔다. 박건하 감독은 “어느 정도 주도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글쎄, “주도했다”는 경기치곤 1-3이란 스코어라인은 너무 기울어 있지 않은가?
한국프로축구연맹경기가 종료되고 기자회견까지 끝난 뒤에도 수원과 전북의 충돌은 이어졌다. 뒤져 보니 전북 공식 소셜미디어가 불나방처럼 활활 타오른 뒤 그대로 산화했다. 수원과 전북의 경기 전, 중, 후를 지켜보면서 오랜만에 축구의 본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이성을 잡아먹는 감성. 축구에서는 적개심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오래전 축구가 이웃 동네끼리 벌이는 패싸움이었듯이 축구 안에는 폭력성이 뿌리 깊다. 한일전에서 경멸이 배제된다면 이미 한일전이 아니다. 수원과 전북의 경기 현장에서 제일 아쉬웠던 건 야유의 부재였다. 이런 상황, 이런 경기에서 딱 들어맞는 음향 효과는 야유인데 말이다.
축구 경기장은 우리가 생활하는 일상과 다르다. 축구는 대한민국 형법이 아니라 축구 규정에 따른다. 길거리에서 타인의 발을 걸어 넘어트리는 건 폭행 범죄다. 그라운드 위에서 슬라이딩태클은 다이나믹한 플레이의 상징이다. 경기 중 물리력 행사는 오직 주심에 의해 관리된다. 공공장소에서 소리를 지르면 ‘미친놈’이지만, 관중석의 소리는 열정의 증거이자 현장을 뜨겁게 하는 원동력이다. 우리는 축구 경기장에 소리를 지르러 간다고 해도 무방하다. 인류 보편적 가치를 침해하지 않는다면, 자기 팀을 응원하는 것만큼 상대 팀을 저주하는 일도 자연스러운 관람 행동이다.
물론 적개심이 선을 넘을 때도 많다. 1980년대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 디에고 마라도나를 앞세운 나폴리가 승승장구했다. 평소 남부 지역을 차별하던 이탈리아 북부 빅클럽(밀란, 인테르, 유벤투스) 팬들은 나폴리를 상대하는 경기에서 ‘베수비오, 너만 믿는다’라는 전단을 뿌렸다고 한다. 2천 년 전, 나폴리 인근 폼페이를 잿더미로 만든 것이 바로 베수비오산이었다. 지금도 유럽 각지의 축구 경기장에선 인종차별 폭언이 드물지 않다. 축구 규정이 아니라 형법으로 다스려야 할 어리석은 언행이다. 하지만 축구에 그런 속성이 내재했다는 사실까지 부정하긴 어렵다. 술이 인간에게 웃음과 죽음을 동시에 주듯이 축구에도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내 인생에서 나는 술과 축구 모두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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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호를 둘러싼 일련의 과정을 관찰한 수원 팬이라면 지금 몹시 화가 나 있을 것이다. 그 상대인 전북이 눈앞에 나타났다. 분노 게이지가 최대치까지 끓어오를 수밖에 없다. 전북전의 걸개 등장은 자연스러운 인과에 가깝다. 전북 측의 소셜미디어 반응도 공식 계정이기에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지 그 자체에 유죄 판결을 내리긴 어렵다. 축구 경기장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놓고 일상의 자제력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기대다. 축구적 현상이 나타날 때마다 일상 규범의 기준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접근 자체가 반(反)축구적일지 모른다. ‘비가 내리니까 우천 연기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유럽 인기 리그보다 K리그는 스토리가 부족하다. 열등해서가 아니라 스토리가 쌓일 역사가 짧은 탓이다. 스토리는 기획이 아니라 자연 발생한다. 백승호 논란이 지금 당장 많은 이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하겠지만 앞으로 계속될 수원-전북 매치업의 열기를 유지해줄 군불이 될 수 있다. 서로 얽히고설키는 수원, 전북, 백승호, 걸개의 대혼돈 앞에서 잘잘못, 과오의 선후를 객관적으로 따지는 건 축구답지 못하다. 누가 먼저 때렸는지는 동네 파출소에서 하면 된다. 축구 경기장에선 축구적으로 넘어가도 될 영역이 존재한다.
글, 그림 = 홍재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