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닷컴] 축구 경기장의 온도는 바깥세상보다 항상 낮다. 날씨가 풀리는 봄에도 여전히 춥다. 경기 관계자와 취재진은 3, 4월에도 롱패딩 차림이다. 그들도 축구 경기장이 바깥보다 추운 이유를 알지 못한다. 겪어보니 춥더라는 경험치일 뿐이다. 물론 축구 경기장이 춥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롱패딩을 껴입어도 추운 건 그냥 추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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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삼성블루윙즈와 FC서울도 시즌 첫 슈퍼매치를 열심히 준비했을 것이다. 경기 전, 박건하 감독은 “서울은 측면 선수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플레이를 한다”라고 말했다. 2경기 연속 골을 넣은 기성용에 관해서 “좋은 승부”라고 덧붙였다. 나름 대비를 했다는 뜻이다. 원정팀 박진섭 감독도 “수원은 리그 최소 실점이다. 가운데 숫자를 늘려서 뚫어볼까 생각 중이다”라고 각오를 밝혔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미리 알고 대비하는 라이벌전.
경기 초반은 추위에 움츠린 내 몸 같았다. 수원은 최후방 수비 라인에 다섯 명을 세워 엉덩이를 뒤로 한껏 뺐다. ‘고무고무 열매’라도 섭취했는지 수원의 대형은 역습 때마다 서울 진영을 향해 죽죽 늘어져 위협을 가했다. 그렇게 싸워 지난 경기에서 포항을 시원하게 해치웠으니 슈퍼매치를 기대하며 빅버드를 찾은 홈 팬들 앞이라고 해서 기본 선수비 대형을 바꿀 이유는 없어 보였다. 패스가 좋은 기성용, 플레이를 잘 만드는 팔로세비치, 공간으로 잘 들어가는 나상호가 수원의 수비 지옥에 갇혀 힘을 쓰지 못했다. 경기는 꽉 막혔다.
한국프로축구연맹2002년생 정상빈이 막힌 혈을 뚫었다. 김건희가 머리로 떨군 볼을 향해 집요하게 어깨를 넣어 도전했다. 김원균이 클리어링 실수를 범하고 황현수가 가랑이 사이를 내주는 행운이 겹치면서 정상빈의 선제골이 터졌다. ‘될 놈은 된다’라는 느낌이었다. 지난 포항전에서도 정상빈의 슛은 마크맨의 두 다리 사이를 통과해서 골네트에 감겼다. 두 경기 연속으로 슛이 마크맨의 다리 사이로 빠져 득점이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슈퍼매치 데뷔전에서 골을 터트린 정상빈은 킬리앙 음바페의 셀러브레이션을 선보였다. 폭발적 스피드, 거침없는 도전, 혼자 해결하는 능력, 그리고 환희의 순간에 굳이 카메라가 없는 곳으로 달려가는 미숙함까지 정상빈의 무궁무진한 잠재력과 어린 나이를 동시에 보여줬다.
한국프로축구연맹서울에 기성용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선 수원은 바로 그 기성용에게 동점을 허용했다. 경기 전 적장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던 한석종이 하필 기성용 앞에서 미끄러졌다. 사람이 제일 많아야 할 수원의 영역에서 갑자기 슛 길이 열렸다. 기성용이 아무런 도전 없이 슛을 때리는 상황에서 수원이 바랄 건 딱 하나다. 슛이 너무 제대로 맞아 골키퍼 정면으로 날아가는 케이스. 아쉽게도 그런 요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성용의 슛은 수원의 왼쪽 골포스트와 몸을 날린 노동건의 손끝 사이로 지나가 골라인을 통과했다. 3경기 연속 득점. 몸은 느려지고 무릎 상태는 불안해졌어도 전직 유럽파 클래스는 그곳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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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전 들어 양쪽의 경기력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연일 계속된 경기 일정 탓인지 체력 저하가 빨리 왔다. 승부에 대한 부담감도 도전적 플레이를 방해하는 것 같았다. 그대로 끝나도 이상할 것 없는 승부를 뒤엎은 건 스쿼드 차이였다. 박건하 감독은 전반 40분 넣었던 니콜라오를 하프타임에 제리치로 다시 바꿨다. 77분에 들여보낸 선수는 37세 염기훈이었다. 반대편 벤치에서는 박정빈, 홍준호, 한찬희, 정한민이 차례대로 들어왔다. 역전골은 서울이 겨울에 영입한 나상호, 팔로세비치, 박정빈을 거쳐 나왔다. 박정빈은 클럽 로고를 가리키며 포효했다. 클럽에 몸을 담은 시간과 잘 어울리지 않는 충성심의 표현. 그냥 그게 멋있어 보인다는 개인의 취향일지도 모른다.
한국프로축구연맹오랜만에 둘은 윗물에서 만났다. 수원월드컵경기장의 기자회견실은 취재진으로 가득했다. 눈대중으로도 취재 기자만 30여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3경기 연속 골을 넣은 기성용은 3경기 연속 기자회견에 참석해 여유 있는 말솜씨를 이어갔다. 국가대표팀 복귀라는 덕담에 가까운 질문에도 “좋은 선수가 많아 나까지 갈 필요는 없는 것 같다”라고 웃어넘겼다. “좀 더 젊었을 때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도 했다”라고 덧붙였다. 물론 이 대답도 일종의 덕담이다. 기성용이 ‘타디스’를 타고 그때로 되돌아간들 행선지가 국내 무대일 확률은 지극히 낮다. 듣는 귀에 살포시 속삭이는 하얀 거짓말. 추운 줄 알면서 냉기에 덜덜 떨면서 본 슈퍼매치는 아닌 줄 알아도 들으면 기분 좋은 ‘캡틴키’의 립서비스로 마무리되었다.
글, 그림 = 홍재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