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은 축구 왕국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모든 월드컵 대회 본선에 진출한 유일한 국가로 월드컵 최다 우승(5회: 1958, 1962, 1970, 1994, 2002)과 최다 경기(109경기, 독일과 동률)을 비롯해 최다 승(73승), 최다 승점(237점), 최다 골득실(+124골)에 이르기까지 월드컵과 관련한 기록이란 기록은 모두 보유하고 있는 국가가 다름 아닌 브라질이다.
이렇듯 화려한 축구 역사를 자랑하는 브라질엔 위대한 10번들이 함께 했다. 10번은 축구에서 에이스들이 다는 번호로 통용되고 있다. 당연히 브라질은 세계 최고의 축구 강국인 만큼 그 어느 팀보다도 화려한 10번 계보를 자랑하고 있다. 스쿼카에서 선정한 역대 브라질 등번호 10번 TOP 10 명단은 아래와 같다.
10. 주니뉴 파울리스타
1990년대 중반, 호나우두와 함께 혜성처럼 등장했던 천재 공격형 미드필더. 1995년 혜성처럼 등장해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을 견인한 그는 1996년 아탈란타 올림픽에서 호나우두와 찰떡 호흡을 과시했으나 나이지리아의 돌풍에 막혀(준결승전 3-4 패)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이어진 1997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 컵에선 우승에 기여하면서 주가를 높이던 주니뉴였다. 이 때만 하더라도 그가 호나우두와 함께 브라질의 미래를 책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팽배해 있었다. 하지만 1998년 월드컵을 앞두고 부상을 당한 데 이어 마리우 자갈루 감독과의 불화까지 겹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자리는 히바우두에게로 넘어갔고, 이후 대표팀에선 크게 두각을 드러내진 못했다. 다행히 2001년 9월,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감독이 브라질 지휘봉을 잡으면서 다시 중용되기 시작했고, 2002년 한일 월드컵 조별 리그 3경기와 16강전까지 모두 선발 출전하면서 월드컵 우승의 영예를 얻을 수 있었다. 개인 통산 A매치 49경기 5골
9위 하이
브라질의 전설적인 공격형 미드필더 소크라치스(지쿠-토니뉴 세레주, 호베르투 파우캉과 함께 브라질 황금의 사중주로 불리던)의 동생으로 형과 마참가지로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솔직히 하이는 형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하는 선수였다. 메이저 대회 참가 경력도 1987년 코파 아메리카와 1991년 코파 아메리카, 그리고 1994년 미국 월드컵이 전부이다(그마저도 대회 기간 내내 꾸준하게 주전으로 뛴 건 주축들이 모두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후 휴식 차원에서 결장했던 1987년 코파 아메리카가 유일하다). 하지만 평가전에서의 꾸준한 활약으로 카를로스 알베르투 파레이라 감독의 눈도장을 찍는 데 성공한 그는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주장으로 참가해 개막전 골을 시작으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영예를 맛보았다(다만 정작 그는 조별 리그 3경기 선발 출전 이후 마지뉴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면서 8강전과 준결승전 교체 출전에 만족해야 했다). 개인 통산 A매치 49경기 17골
8위 자이르
펠레 등장 이전 브라질의 에이스. 1949년 코파 아메리카에선 7경기에 출전해 9골을 몰아넣는 괴력을 과시하면서 득점왕에 등극하는 영예를 얻었다. 그의 활약 덕에 브라질은 1922년 이후 27년 만에 코파 아메리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어서 그는 자국에서 열린 1950년 월드컵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펼치면서 결승행을 견인했으나 무승부만 거두더라도 우승을 할 수 있었던 우루과이와의 최종전에서 1-2로 패하면서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다(당시 월드컵은 흥행을 목적으로 한 경기라도 더 치르기 위해 토너먼트제가 아닌 1라운드 조별 리그와 2라운드 결선 리그를 통해 우승팀을 가렸다). 이 경기는 마라카낭의 비극으로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자이르는 1956년 1월까지 대표팀에서 뛰면서 A매치 39경기 22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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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위 호베르투 히벨리누
펠레의 후배격에 해당하는 선수.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브라질 대표팀에 등장한 그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선 펠레의 왼쪽 날개 역할을 담당하면서 3골로 우승에 기여했다(당시 그는 11번을 달고 뛰었다). 펠레의 은퇴와 동시에 등번호 10번을 물려받은 그는 1974 서독 월드컵과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도 연달아 참가했으나 아쉽게 결승 문턱에서 탈락의 고배(1974년 4위, 1978년 3위)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가 선배 펠레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수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전매특허 드리블 기술이었던 엘라스티코(요즘은 플립 플랩으로 더 많으 통용되고 있다)는 호마리우와 호나우지뉴 같은 후배들에게 계승되고 있다. A매치 통산 92경기 26골
6위 카카
축구 팬들에겐 너무 유명한 그 이름, 카카이다. 호나우두(1997, 2002년)와 히바우두(1999년), 호나우지뉴(2005년)에 이어 브라질 선수로는 4번째로 발롱 도르(2007년)를 수상(발롱 도르는 1995년 들어서 처음으로 비유럽 선수들에게 문호를 개방했기에 펠레나 히벨리누, 지쿠 같은 선배들은 수상 자체가 불가능했다)한 천재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2002년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어린 선수 육성 차원(브라질은 월드컵 참가 시 한 자리를 유망주에게 주는 경향이 있다. 1994년 호나우두가 대표적인 예시)에서 한일 월드컵에 참가해 비록 벤치를 지켰으나 우승의 영예를 얻으며 화려한 출발을 알렸다. 이후 그는 골드컵 2003(준우승)을 시작으로 브라질 대표팀에서도 중심축으로 떠올랐다. 비록 아쉽게도 우승과는 크게 인연을 맺지는 못했고(그가 주축이 되어서 우승한 건 2005년과 2009년 컨페더레이션스 컵 우승이 전부이다), 무엇보다도 무릎 부상이 완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참가를 강행했다가 부상 부위가 더 악화되는 악재가 발생하면서 전성기가 예상보다 빨리 저물었다. 그럼에도 그가 위대한 선수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A매치 통산 92경기 29골
5위 네이마르
아직 그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럼에도 만 28세의 나이에 벌써 센츄리 클럽(A매치 100경기)에 가입하면서 브라질 역대 A매치 최다 출전 공동 5위(101경기)를 기록하고 있고, 61골로 펠레(77골)와 호나우두(62골)에 이어 최다 득점 3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사실상 브라질 A매치 최다 골은 예약해두었다는 평가까지 들으면서 개인 기록에 있어선 펠레의 뒤를 잇는 역대급 행보를 달리고 있다. 문제는 우승에 있다. 2013년 컨페더레이션스 컵 우승 외에는 그가 브라질 성인 대표팀에서 달성한 우승이 전무하다. 2019년 브라질의 코파 아메리카 우승은 그가 부상으로 결장한 상태에서 거둔 성과이다. 분명 현재까지도 그는 위대한 축구 선수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브라질의 위대한 선배들의 계보를 이어나가기 위해선 우승 트로피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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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위 히바우두
역시나 말이 필요없는 전설. 대표팀 초창기엔 쟁쟁한 선배들은 물론 1살 후배인 주니뉴 파울리스타에게도 밀리면서 클럽에서의 화려한 경력과는 달리 주로 벤치를 지켜야 했으나 마리우 자갈루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메이저 대회에서 처음으로 주전으로 나섰던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맹활약을 펼치면서 전 세계 축구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어서 1999년엔 코파 아메리카에서 5경기에 출전해 5골을 넣으며 득점왕과 동시에 브라질의 우승을 견인했고, 소속팀 바르셀로나에서도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발롱도르를 수상해 세계 축구계의 정점에 올라섰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호나우두-호나우지뉴와 함께 3R로 상대 골문을 폭격하면서 브라질에 통산 5번째 우승을 선사했다. A매치 통산 74경기 35골로 브라질 역대 최다 득점 7위를 기록 중이다.
3위 호나우지뉴
'외계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당대 압도적인 기량을 과시하던 천재 공격형 미드필더. 1999년 만 19세의 나이에 혜성처럼 등장해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1999년 컨페더레이션스 컵에선 5경기에 출전해 6골 7도움을 올리는 괴력을 과시하면서 2대회 연속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어서 3R의 일원으로 월드컵 우승(2002년)까지 차지하면서 만 22세의 나이에 브라질 대표팀에서 차지할 수 있는 우승이란 우승은 모두 일찌감치 달성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심지어 2005년엔 컨페더레이션스 컵 우승에 이어 소속팀 바르셀로나에서의 활약(프리메라 리가와 챔피언스 리그 2관왕)에 힘입어 발롱 도르를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이게 모두 그의 나이 만 25세에 거둔 성과이다. 하지만 이후 그는 자기 관리에 실패하면서 급격하게 하향세를 탔다. 25세를 끝으로 전성기가 꺾였음에도 그는 브라질 역대 최다 출전 10위(97경기)와 최다 골 8위(33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만약 그가 자기 관리에만 철저했어도 축구사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지도 모른다.
2위 지쿠
'하얀 펠레'라는 별명이 붙은 브라질이 자랑하는 공격형 미드필더. 비록 월드컵 우승이 없기에 전 세계적으로는 다소 저평가되는 경향이 없잖아 있으나 브라질에서 그의 위상은 펠레 바로 다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펠레-호나우두-지쿠 순이 일반적이다). 1976년 브라질 대표팀에 승선한 그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무패 3위를 기록하면서 아쉽게 우승에 실패했다(당시 월드컵은 1차 조별 리그와 2차 조별 리그를 통해 결승 진출팀과 3, 4위전 진출팀이 정해졌는데 2차 조별 리그에서 브라질은 2승 1무로 우승팀 아르헨티나와 동률이었으나 골득실에서 밀려 아쉽게 탈락했다). 이어서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선 5경기에서 4골을 넣으며 맹활약을 펼쳤으나 2차 조별 리그에서 이탈리아에게 2-3으로 석패하면서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부상을 안고 참가했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선 8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아쉽게 탈락했는데 당시 지쿠는 후반전 페널티 킥을 실축해 패배의 원흉으로 몰리기도 했다. 이렇듯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으나 그는 A매치 71경기에 출전해 48골을 넣으며 브라질 역대 최다 골 5위에 올라있다. 특히 프리킥에 있어선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다.
1위 펠레
말이 필요없는 축구사 역대 최고의 선수. 1958년 만 17세의 나이에 스웨덴 월드컵에 혜성처럼 등장해 결승전 멀티골 포함 무려 4경기에 출전해 6골을 넣으면서 전 세계 축구계를 강타했다(심지어 프랑스와의 준결승전에선 해트트릭을 장식했다).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선 다리 근육이 마비되는 부상으로 2경기 출전에 그쳤으나 동료 선수들의 활약 덕에 월드컵 2연패를 달성한 그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편파 판정 및 거친 태클에 부상으로 고전하면서 조별 리그 탈락의 아픔을 맛봐야 했다. 하지만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펠레가 이끄는 브라질은 6전 전승으로 우승하며 1966년의 아쉬움을 달랬다. 이와 함께 펠레는 축구사에서 유일하게 월드컵 3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이루었다. 원래 펠레 등장 이전까지 10번은 최전방 공격수 밑에 위치한 공격형 미드필더 내지는 2선 공격수가 다는 번호에 불과했다. 하지만 1958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 축구협회가 등번호를 제출하지 않는 바람에 우루과이 출신 FIFA 직원이 임의대로 브라질 선수들에게 등번호를 지정하면서 당시 만 17세에 불과했던 신인 선수 펠레가 10번을 받게 된 것이었다(심지어 주전 골키퍼 지우마르는 뜬금없이 등번호 3번을 달고 뛰어야 했다). 하지만 우연의 결과로 등번호 10번은 전설이 되었고, 이후 10번은 에이스 번호로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 즉 펠레가 곧 등번호 10번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Omar Moma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