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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셔-빌모츠-회베데스' 샬케 역대 베스트 일레븐은?

샬케는 바이에른 뮌헨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뒤를 잇는 독일의 명문 구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샬케는 단 한 번도 분데스리가에서 우승을 차지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샬케가 독일에서 명문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분데스리가 이전 시대에 총 7회의 독일 챔피언에 오르면서 뉘른베르크(8회)와 함께 양강으로 군림했던 과거가 있고, 탄광촌인 겔젠키르헨을 연고로 하면서도 독일에서 바이에른 뮌헨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팬 베이스를 자랑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독일 내만 따지면 도르트문트보다도 더 서포터 수가 많은 팀이 바로 샬케이다).

하지만 엄밀히 분데스리가 시대만 놓고 보면 샬케는 영욕의 세월을 보낸 구단에 가깝다. 1970/71 시즌 아르미니아 빌레펠트와의 경기에서 샬케 선수들이 돈을 받고 일부로 패하는 승부조작을 벌여 대대적으로 2년 출전 정지 징계 처분을 받는 사태가 발생했다(이로 인해 에이스 스탠 리부다와 핵심 수비수 롤프 뤼스만을 비롯한 주축 선수들이 샬케를 떠나 해외로 진출했고, 간판 공격수 클라우스 피셔와 수비진의 리더였던 클라우스 피히텔 같은 선수들은 샬케에 잔류하면서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출전 정지 징계가 6개월로 경감되면서 다시 샬케 선수들은 돌아왔으나 핵심 선수들이 대거 은퇴한 1970년대 후반부터 하위권을 전전하다가 결국 80년대엔 분데스리가와 2부 리가를 오가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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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샬케는 1980년대 말에 올라프 톤과 옌스 레만 같은 유스 출신 재능들이 등장했고, 명단장으로 명성을 떨쳤던 루디 아사우어의 영리한 선수 영입 수완으로 능력있는 선수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면서 1990년대 중반부터 다시 상위권으로 급부상하면서 1996/97 시즌 구단 역사상 최초로 유럽 대항전 우승(UEFA컵)을 차지한 데 이어 2000/01 시즌과 2001/02 시즌 2시즌 연속 DFB 포칼(독일 FA컵) 우승을 달성하면서 분데스리가 시대 이후만 놓고 보면 황금기를 구가했다. 특히 2000/01 시즌 샬케는 분데스리가 우승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추가 시간 4분에 역전 우승을 내주면서 준우승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당시 샬케가 바이에른과 승점 동률인 상태에서 골득실에서 앞섰으나 바이에른이 추가 시간 4분에 함부르크 상대로 극적인 동점골을 넣으면서 승점 1점 차 역전 우승을 달성했다. 이로 인해 샬케에겐 '4분 챔피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비록 샬케는 분데스리가 우승은 없지만 포칼 결승 진출 횟수는 12회(이 중 우승은 5회)로 바이에른(23회)에 이어 당당히 2위를 달리고 있다. 포칼 준우승 횟수는 7회로 최다이고, 분데스리가 준우승 횟수 역시 7회로 바이에른(9회)에 이어 2번째로 많다. 말 그대로 준우승 제조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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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 옌스 레만

많은 축구 팬들은 레만하면 아스널 무패 우승 골키퍼로 인식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 이전에 샬케 유스 출신으로 프로 데뷔해서 무려 10시즌을 보낸 전설 그 자체이다. 샬케 소속 출전 경기 수도 310경기로 노르베르트 니그부르(440경기)에 이어 골키퍼 역대 2위에 해당한다. 특히 그는 1996/97 시즌 당시 UEFA컵 결승전에서 우승후보 인테르를 상대로 환상적인 선방쇼를 펼치면서 샬케에 구단 역사상 유일한 유럽 대항전 우승 트로피를 선사했다. 당시 그는 승부차기에서 이반 사모라노와 아론 빈테르의 슈팅을 연달아 선방하면서 승부차기 스코어에서 4-1이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1997년, UEFA 선정 올해의 골키퍼에 뽑히는 영예를 얻었다. 그에게 있어 유일한 흠결은 바로 샬케에서 AC 밀란으로 이적(1998년 6월)하자마자 실패를 맛보고선 단 6개월 만에 더비 라이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이적(1999년 1월)했다는 데에 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샬케 팬덤으로부터는 그리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는 영웅적인 활약으로 UEFA컵 우승을 선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샬케의 전설로 두고두고 회자될만 하다(실제 샬케 박물관에는 UEFA컵 결승전 승부차기 영상이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다). 게다가 1997/98 시즌 도르트문트와의 경기에서 종료 직전 헤딩 슈팅으로 극적인 동점골(2-2 무승부)을 넣으며 레비어 더비의 명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CB 베네딕트 회베데스

샬케 유스 출신으로 2007년 프로 데뷔해 2017년까지 10년 동안 뛰면서 팀에 헌신했다. 기본적으로는 중앙 수비수지만 팀 사정에 따라 좌우 측면 수비수는 물론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소화했던 회베데스였다. 무엇보다도 그가 샬케 팬들에게 사랑을 독차지한 건 충성심에 있었다. 그는 많은 빅클럽들의 러브콜을 받았음에도 마츠 훔멜스의 사례(더비 라이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주장이었음에도 2016년 여름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했던)를 거론하면서 "난 그와는 달리 샬케에서 다른 많은 걸 이루고 싶다"라고 밝혀 팬들의 찬사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2017년 여름, 그는 당시 샬케 감독이었던 도메니코 테데스코의 외면을 받으면서 쫓겨나다시피 유벤투스로 임대를 떠났고, 2018년 여름엔 로코모티브 모스크바로 이적 수순을 밟기에 이르렀다. 비록 마지막은 배드 엔딩에 가까웠으나 그는 샬케 소속으로 구단 역대 7번째에 달하는 335경기에 출전하면서 영원한 주장으로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CB 클라우스 피히텔

샬케가 자랑하는 리베로형 수비수. 1965년 샬케에서 프로 데뷔해 1980년까지 15시즌을 뛰다가 만 35세의 나이에 세대교체를 이유로 당시 2부 리가로 강등됐던 베르더 브레멘으로 이적 수순을 밟았다(하지만 정작 해당 시즌 피히텔은 샬케가 감독이 무려 3명이나 교체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안정적인 수비와 강력한 리더십으로 분데스리가 8위 안착을 이끌어냈다). 브레멘으로 이적하자마자 그는 전경기(42경기)에 출전해 강등 첫 시즌 만에 다시 팀을 분데스리가로 승격시키는 데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반면 샬케는 피히텔이 떠난 공백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해당 시즌 17위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브레멘과 샬케의 운명이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이후 그는 샬케가 2부 리가를 전전하는 동안 브레멘에서 분데스리가 3시즌을 더 소화했고(2부 리가까지 포함하면 총 4시즌), 샬케가 분데스리가 승격에 성공하자 선수 경력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다시 친정팀으로 돌아가기에 이르렀다(1984년). 이후 그는 샬케에서 4시즌을 더 뛰다가 선수 경력의 마무리를 지었다. 샬케 구단 역대 최다 경기 출전 선수(543경기)이자 분데스리가 역대 최고령 출전 기록(만 43세 6개월 2일)이기도 하다.


CB 롤프 뤼스만

샬케 역사상 대인 수비에 있어서만큼은 최고라는 평가를 들었던 전설적인 수비수. 수비 라인 전체 지휘를 피히텔이 했다면 뤼스만은 전담 수비로 상대 에이스를 꽁꽁 묶어내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다. 1969년 샬케에 입단해 1973년까지 수비진의 중추 역할을 담당했으나 1970/71 시즌 구단 차원에서 이루어진 승부조작의 여파로 2년 출전 정지 징계가 떨어지자 클럽 브뤼헤로 이적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징계 기간이 6개월로 줄어들면서 곧바로 1974년 1월에 샬케로 돌아온 그는 1980년까지 뛰다가 더비 라이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1981년 1월 이적해 주장직까지 수행(1983-1985)하면서 배신자로 낙인 찍혔다. 이 점이 그가 샬케 역대 최고의 스토퍼이면서도 팬들에겐 그리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로 자리잡고 있다. 그래도 그는 샬케 소속으로 336경기에 출전하면서 구단 역대 최다 출전 5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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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 헤페르손 파르판

PSV 에인트호벤 시절 박지성-이영표와 함께 팀 동료로 뛰었던 걸로 국내 축구 팬들에게도 친숙한 선수. 페루가 자랑하는 측면 미드필더로 2008년 샬케에 입단해 2015년까지 7시즌을 뛰면서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가 있는 동안 샬케는 2010/11 시즌 포칼 우승과 구단 역대 챔피언스 리그 최고 성적인 준결승 진출에 더해 2011년 DFL 슈퍼컵 우승을 달성했다. 다른 전설들과 비교하면 오랜 기간 샬케에서 뛴 건 아니지만 공식 대회 228경기에 출전해 53골 69도움을 올리면서 구단 역대 최다 도움 기록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샬케의 에이스는 파르판이었다는 건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CM 올라프 톤

샬케 황금기의 최대 주역 중 한 명. 프로 데뷔 당시 그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5시즌 동안 공식 대회 183경기에 출전해 64골을 넣으며 뛰어난 득점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그는 1988년 여름, 독일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로 추앙받고 있는 로타르 마테우스의 후계자격으로 바이에른 뮌헨 이적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1991/92 시즌 막판, 새로 바이에른 지휘봉을 잡은 에리히 리벡 감독 체제에서 리베로로 변신에 성공했고, 1994년 여름 샬케로 복귀해 2002년까지 8시즌을 더 뛰면서 핵심 수비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가 있는 동안 샬케는 UEFA컵 우승(1996/97 시즌)과 포칼 2연패(2000/01, 2001/02)을 달성하면서 분데스리가 시대 개막 이래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키는 170cm로 단신이었으나 '교수'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로 뛰어난 축구 지능을 바탕으로 수비 라인을 조율해 나갔다. 샬케 소속으로 구단 역대 3위에 해당하는 383경기에 출전해 75골 26도움을 기록했다.


CM 마르크 빌모츠

엔조 시포와 함께 벨기에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로 평가받고 있는 선수. 실제 이 두 선수만이 벨기에 역사상 월드컵 본선에 4회 출전하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야생 맷돼지'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다부진 체격과 강한 피지컬, 그리고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많은 공격 포인트를 양산해내는 선수였다. 1996년, 스탕다르 리에쥬에서 샬케로 이적해온 그는 데뷔 시즌부터 구단의 에이스 역할을 수행하면서 UEFA컵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당시 결승전은 홈앤어웨이 방식의 1, 2차전으로 치러졌는데 그는 1차전에 골을 넣으며 1-0 승리를 견인했고, 2차전에선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서면서 피날레를 장식했다). 4시즌을 뛴 후 2000/01 시즌 보르도로 떠났으나 1년 만에 다시 샬케로 돌아오자마자 포칼 우승(2001/02)을 선사하면서 우승 청부사라는 인식을 각인시켜주었다. 샬케에서 6시즌 밖에 뛰지 않았으나 샬케 역대 최고의 선수로 피셔, 리부다, 피히텔, 올라프 톤과 함께 항상 거론되고 있다.


LM 잉고 안데르브뤼게

왼쪽 측면 미드필더는 물론 공격형 미드필더와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모두 소화할 수 있었던 멀티 미드필더. 1996/97 시즌 UEFA컵 결승전에선 승부차기 첫번째 키커로 나섰고, 은퇴 후엔 NFL 유럽 리그에서 키커 역할을 담당했을 정도로 킥에 일가견이 있는 선수였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그는 1984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프로 데뷔했으나 주전으로 나섰던 데뷔 시즌을 제외하면 이후 3시즌 동안 벤치를 전전하다가 당시 2부 리가에 있었던 샬케로 이적해 스타 플레이어로 성장하면서 분데스리가 승격 및 구단 역대 최초의 유럽 대항전(UEFA컵) 우승의 주역으로 발전했다는 데에 있다. 이것이 그가 샬케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주된 이유이다(샬케 올타임 베스트 일레븐에 항상 이름을 올리고 있다). 샬케 소속으로 353경기에 출전해 88골 44도움으로 구단 역대 최다 출전 6위와 최다 골 4위, 최다 도움 3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RW 스탠 리부다

샬케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선수 중 한 명이었던 전설적인 측면 공격수. 원래 그의 이름은 라인하르트이지만 '스탠'이라는 별명이 이름으로 굳어진 독일에선 상당히 흔치 않은 케이스이다. 스탠은 현대 축구에서 처음으로 윙이라는 포지션을 정립시킨 잉글랜드가 자랑하는 '드리블의 마술사' 스탠리 매튜스(초대 발롱 도르 수상자)에서 따온 것으로 그 역시 화려한 드리블 능력을 자랑하는 전형적인 윙어였다. 심지어 샬케 팬들은 "스탠 리부다를 제외하면 아무도 신의 섭리를 피해갈 수 없다"라는 노래를 불렀을 정도였다. 샬케 유스 출신으로 1961년 프로 데뷔해 4시즌을 뛰다가 더비 라이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이적한 전적이 있고(1965/66 시즌 컵 위너스 컵 결승전에서 리버풀 상대로 결승골을 넣으며 도르트문트에 우승을 선사했기에 샬케와 도르트문트 양 구단에서 에이스로 활약했다는 의미에서 '베스트팔렌의 왕'이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1972년 6월엔 1970/71 시즌 구단 차원에서 이루어진 승부조작의 여파로 2년 출전 정지 징계가 떨어지자 스트라스부르로 곧바로 이적하는 등 다양한 사건 사고에 휘말렸으나 그의 화려한 테크닉에 매혹된 샬케 팬들은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마지막 순간엔 다시 샬케로 돌아왔기에(도르트문트 이적 당시엔 3시즌 만에 샬케로 돌아왔고, 스트라스부르의 경우 승부조작으로 인한 출전 정지 징계가 6개월로 줄어들자 1시즌 만에 다시 돌아왔다) 뤼스만처럼 배신자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 샬케에서만 3차례에 걸쳐 정확하게 10시즌을 소화했다.


CF 클라우스 피셔

샬케 역대 최고의 전설이자 분데스리가 역대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으로 뽑히는 선수. 실제 분데스리가만 국한지어놓고 보면 그는 268골로 게르트 뮐러(365골)에 이어 역대 최다 골 2위를 달리고 있다. 비록 뮐러라는 쟁쟁한 선배와 활약한 시기가 상당 부분 겹치기에(뮐러가 피셔보다 4살이 더 많다) 득점왕을 차지한 건 1975/76 시즌(29골)이 전부이지만 4시즌 연속 20골 이상(1975/76 - 1978/79)을 기록했고, 1972/73 시즌 승부조작 문제로 1시즌 전체를 결장한 걸 제외하면 9시즌 연속 두 자리 수 골(1969/70 - 1978/79)을 넣을 정도로 꾸준한 득점력을 자랑했다. 바이시클 킥의 달인으로 어떤 각도에서도 다양한 자세로 골을 넣는 전형적인 득점 기계형 공격수였다. 프로 데뷔 자체는 1860 뮌헨에서 뛰었고, 선수 생활 말년은 쾰른과 보훔에서 보냈으나 1970년부터 1981년까지 11년 동안 샬케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샬케의 왕으로 군림했다.


LW 게랄트 아사모아

인간 승리의 표본으로 불리는 선수. 가나에서 태어나 12살에 독일로 이주해온 이민자로 1996년 하노버에서 프로 데뷔했다. 이후 1998년 심장비대증으로 인해 선수 생활 은퇴 위기에 놓였으나 수술을 통해 심장 제세동기를 달고 뛰면서 오랜 기간 철저한 관리를 받으면서 선수 경력을 이어왔다. 이렇듯 힘든 여건 속에서도 그는 2001년 독일 국적을 취득해 최초의 흑인 선수 독일 대표팀 승선이라는 쾌거를 이룩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극우 세력들에게 각종 인종 차별 및 야유에 시달려야 했음에도 굴복하지 않고 힘든 싸움을 이어나갔다. 그가 버텨준 덕에 분데스리가에서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캠페인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2006년엔 아사모아를 위해 "인종차별에 레드카드를"이라는 문구가 적힌 빨간 카드를 들고 인종차별 반대 캠페인을 펼친 바 있다). 샬케엔 1999년 입단해 2010년까지 11시즌 동안 뛰면서 에베 산과 함께 포칼 2연패(2000/01, 2001/02)의 주역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장크트 파울리(2010/11)와 그로이터 퓌르트를 거쳐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샬케 2군팀에서 보내면서 후배들 육성에 힘을 쏟았다. 이런 점들이 그가 현재 샬케의 명예 대사로 활약하면서 구단의 얼굴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이유이다. 샬케 소속으로 381경기에 출전해 64골 45도움으로 구다 역대 최다 도움 2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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