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닷컴] 박병규 기자 = 아시아축구연맹(AFC)이 차두리(현 오산고 감독)를 재조명했다. 위대한 선수로 업적을 이룬 차범근의 아들로 살아온 차두리의 축구 인생을 돌이켜보았다.
AFC는 한국 시각으로 지난 18일 차두리의 축구 인생을 재조명했다. 어린 시절부터 국가대표 은퇴까지 그가 홀로 싸워온 고난과 역경, 편견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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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두리의 아버지 차범근은 아시아는 물론 축구 종주국 유럽에서 위대한 업적을 날린 선수였다. UEFA 2회 우승을 포함하여 분데스리가 역대 아시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자 98골로 외국인 득점 기록 상위권에 올라있는 레전드다. 뿐만 아니라 한국 대표팀 최다 출전자(136경기)와 최다골(58골) 기록 보유자다.
위대한 선수의 아들이자 축구 선수로 살아가는 것은 여간 큰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차두리는 “가끔 아버지가 미웠다. 아버지가 그동안 성취하고 이룬 것은 내 커리어에서 큰 벽이었다. 축구선수로서 아버지는 나의 우상이자 목표였다. 아버지처럼 위대한 선수가 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Getty차두리는 독일에서의 학창 시절을 회상했다. ‘차붐’으로 명성을 떨친 아버지의 활약은 매주 화제였다. 차두리는 "주말 경기에서 아버지가 어떻게 경기를 했느냐에 따라 나의 월요일이 매우 달라졌다. 주말에 잘했으면 나는 학교에서 자랑스러웠지만, 잘하지 못했다면 더 조용해지는 등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했다.
그는 “특히 그 시절에는 오늘날 같은 게임기, 인터넷 등이 없었기에 어린 아이들에게 축구는 가장 큰 오락이었다. 당시 모두가 축구선수를 꿈꿨다”고 했다. 이어 “우리 가족은 어디를 가든 큰 환영을 받았다. 그래서 축구 선수가 되면 이런 환호가 당연한 줄 알았다”며 기억을 떠올렸다. 물론 가족들은 행여나 아버지 경기에 방해가 될까 봐 경기장을 찾지 않았다. 1988년 UEFA 결승전 차범근의 헤딩골 장면을 TV로 봤다.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은 차두리는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고려대 입학 후 공격수로 가능성을 보였고 2001년 11월, 21세 나이로 국가대표에 데뷔하였다. 이후 2002 한일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뽑혔다. 그는 “정말 놀랐다. 프로에 가기 전 대학생 신분으로 대표팀에 소집되어 활약하는 것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히딩크 감독과 코치진들은 빠른 스피드와 체격이 좋기에 내가 필요하다고 했다. 물론 청소년 대표팀에 뽑힌 경력도 없었기에 논란이 많았다. 항상 편견과 맞서고 극복해야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월드컵 출전이 항상 꿈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차두리는 2002 월드컵 이후 분데스리가 레버쿠젠에 입단했다. 그는 “당시 어렸고 자신만만했다. 항상 독일에 돌아와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아버지가 레버쿠젠에서 유명한 선수였기에 부담이 없었다”며 친근한 구단으로 느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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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차두리는 당시 빌레펠트와 프랑크푸르트에 임대되어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였고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차두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고 훌륭한 선수였는지 깨달았다. 어느 순간 부담감과 압박감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고 했다.
프랑크푸르트 완전 이적 후 그는 공격수에서 풀백으로 포지션 변경을 시도하였다. 당시 프리트헬름 풍켈 감독의 조언이 컸다. 차두리는 “공격수로서 득점이 없다 보니 부담감이 컸다. 골 가뭄이 심해서 매 경기 너무 긴장되었다. 풍켈 감독이 나의 장점인 스피드와 피지컬을 활용하여 풀백을 제안하였다. 부담스러웠지만 능력을 발휘하여 경기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후 차두리는 마인츠로 이적하여 위르겐 클롭 감독의 지휘 아래 전문적인 풀백으로 거듭났다.
[2편에 계속]
사진 = 대한축구협회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