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후반, 유럽 최고 선수 중 하나였던 루드 굴리트(뤼트 휠릿)
▲ 인지도 하나 만큼 여타 레전드보다 상위권
▲ 가상 세계에서 최고로 불리는 굴리트, 잘 알지만 모르겠네?
[골닷컴] 박문수 기자 = 발롱도르 2020 드림팀에 선정될 공격형 미드필더 후보는 총 10명이다. 이들 중 단 한 명만이 베스트 11 후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20명의 미드필더 중 1명은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 나선다.
쟁쟁한 후보들이 이름을 올렸다. 포지션이 포지션인 만큼 축구 팬이라면 한 번은 들어봤을 레전드 선수들이 이름을 채우고 있다. 대표적인 선수가 펠레다. 사실상 이 포지션은 펠레 수상이 매우 유력하다. 펠레 이외에도 디에고 마라도나와 지네딘 지단 그리고 지쿠와 플라티니, 디 스테파노 또한 해당 포지션에 이름을 올렸다.
눈에 익은 선수 중 하나가 바로 굴리트다. 이 선수 무려 발롱도르 위너다. AC 밀란 두 번째 전성기 시절 주축 멤버였으며 1998년을 끝으로 현역 은퇴했지만, 2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팬들 사이에서 자주 이름을 오르내리고 있다. 물론 현실보다는 가상세계에서.
게임 때문에 유명해서, 누군지는 알아도, 어떤 선수인지는 잘 모르는 굴리트. 이번 '축구계 슈가맨을 찾아서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 공격형 미드필더는 네덜란드와 AC 밀란의 레전드 루드 굴리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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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리트는 누구
1962년생이다. 1980년대 후반, 반 바스텐 그리고 레이카르트와 함께 AC 밀란 전성기를 이끈 네덜란드 레전드다.
신체 조건이 상당히 좋다. 키도 큰데 발도 빠른 편이었다. 가장 큰 장점은 전술 이해도다. 기본적으로는 공격형 미드필더지만, 공격부터 수비까지 여러 포지션을 소화한 멀티 플레이어다. 물론 전문 센터백으로 나서진 않았다. 피지컬도 상당한데, 전 포지션에서 고른 활약을 보여주는 육각형 선수였다. 물론 앞서 말했듯 굴리트의 주력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그래서 공수 겸비한 피지컬 좋은 선수에게 늘 따라붙는 수식어가 바로 '제2의 굴리트'다.
# 선정 이유
France football고민할 것도 없었다. 누구 말대로 '참 좋은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라는 문구에 가장 어울리는 선수였다. 굴리트의 국내 인지도는 여타 레전드에 꿇리지 않는다. 적어도 국내 한정으로 굴리트는 이번 발롱도르 공격형 미드필더 후보 중 인지도 만큼은 가장 높을 것이다.
축구 황제이자 20세기 최고 선수로 꼽히는 펠레보다 굴리트를 아는 이가 더 많을 것이다. 오히려 펠레보다도 더 사랑받을 것이다.
간단하다. 축구 게임 때문이다. 굴리트의 경우 기본적으로 발롱도르 위너였다. 당연히 능력치가 좋을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피지컬이 좋다. 그리고 빨랐다.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여러 포지션도 소화했다. 게임에서도 그렇다. 공격에 무게가 좀 더 실렸지만, 수비력도 뒷받침하는 탄탄한 선수인 만큼 유저 입장에서는 구매가 당길 수밖에 없다. 게다가 키도 크니 몸싸움에서 유용하다. 근데 빠르기까지 하니 우!아!할 수밖에 없다.
ea sports fifa심지어 메날두도 굴리트에는 한 수 접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게임 내에서는 그 어떤 선수도 굴리트보다 앞선다고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영향력이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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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커리어
네덜란드 출신 레전드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바로 아약스 암스테르담이다. 굴리트는 달랐다. 로테르담 출신인 그는 하를럼에서 프로 데뷔했고, 1982년 페예노트르 이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페예노르트에서 PSV로 이적했다. 당연히 경쟁 팀으로 둥지를 옮긴 만큼 페예노르트 팬들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굴리트가 세계 최고 선수 중 한 명이 된 계기는 1987년 AC 밀란 입단 이후다. 지금이야 몰락한 명문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밀란은 정말 몰락한 명문이었다. 1978/1979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다음 시즌에는 승부 조작 행위 연루로 강등됐다. 1980/1981시즌 세리에B 1위로 승격했지만, 1981/1982시즌에는 저조헌 팀 순위로 또 한 번 2부리그로 강등됐다. 1983년 다시금 승격했지만, 1986/1987시즌까지 밀란 순위는 5-7위를 왔다 갔다 했다.
그러던 중 밀란은 당시 정계 진출을 노리던 실비오 베를루스코가 구단을 인수했고 파격적인 투자를 통해 팀의 기판을 마련했다.
당시 밀란이 데려온 선수는 오렌지 삼총사 레이카르트와 판 바스텐 그리고 굴리트였다. 굴리트 영입 이후 밀란은 세 차례에 걸쳐 세리에A 우승을 차지했고, UEFA 챔피언스리그(유러피언컵)에서는 두 시즌 연속 정상에 올랐다. 1988/1989시즌에는 대회 결승전에서 두 골을 가동하며 밀란의 4-0 완승을 이끌었다. 1989/1990시즌에는 부상으로 밀란의 대회 우승에 크게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대신 결승전에서는 풀타임 출전했다.
France football이 시기 밀란은 '밀란 제너레이션 2기'로 일명 불린다. 활약상을 인정받은 굴리트 또한 1987년에는 발롱도르를 그리고 1988년에는 발롱도르 2위를 기록했다. AC 밀란 명예의 전당 헌액은 물론, 2017년에는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월드 사커에서 선정한 위대한 100명의 축구 선수 그리고 피파 선정 FIFA 100에도 뽑혔다.
밀란 이외에도 삼프도리아와 첼시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첼시에서는 감독 겸 선수로 활약했다. 다만 감독으로서 굴리트는 선수 시절과 비교하면 다소 초라하다.
대표팀 커리어도 제법 화려했다. 유로 1988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1981년 9월 네덜란드 A팀 데뷔 이후, 1994년까지 66경기에 나와 17골을 가동했다. 참고로 네덜란드가 우승을 차지했던 유로 1988에서는 구소련과의 결승전에서 선제 득점을 터뜨렸다. 1990 네덜란드 월드컵에서도 네 경기 풀타임 출전했지만, 네덜란드 자체가 뭔가 풀리지 않았다. 16강전에서는 레이카르트의 비신사적인 행위로 경기 초반부터 수적 열세에 고전했다. 그리고 패했다.
유로 1992녀에서도 출전했지만, 네덜란드는 덴마크와의 준결승전에서 패했다. 공교롭게도 독일에 이어 덴마크까지, 네덜란드를 토너먼트에서 제압한 팀은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1994 브라질도 마찬가지. 다만 이 당시 굴리트는 월드컵에 출전하지는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