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mburger SV All-Time Best Eleven

'젤러-키건-칼츠' 함부르크 역대 베스트 일레븐은?

함부르크는 현재 대한민국 대표팀 공격수 손흥민의 친정팀으로 국내 축구 팬들에게 친숙한 구단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함부르크는 북독을 대표하는 명가이다. 분데스리가 팀으로는 바이에른 뮌헨(5회)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함께 챔피언스 리그 우승 경험이 있는 세 구단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지금의 함부르크는 독일 2부 리가에 있는 몰락한 명가이지만 2017/18 시즌까지만 하더라도 독일에서 유일하게 분데스리가에서 전 시즌을 뛰고 있는 구단이었다. 이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히 강했기에 함부르크 홈구장엔 '분데스리가 시계(함부르크가 분데스리가에서 보내고 있는 기간을 시계로 설치한 것)'가 설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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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함부르크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만프레드 칼츠와 펠릭스 마가트, 그리고 호어스트 흐루베슈 등을 중심으로 황금기를 구축했다. 이 시기에 함부르크는 분데스리가 우승 3회(1978/79, 1982/83)와 DFB 포칼(독일 FA컵) 우승 2회(1975/76, 1986/87)에 더해 1976/77 시즌 컵 위너스 컵(UEFA컵 전신) 우승에 더해 1982/83 시즌 유러피언 컵(챔피언스 리그 전신) 우승까지 차지하면서 독일을 넘어 유럽을 호령하는 강호로 군림했다.

하지만 1990년 들어 구장 재보수 등의 문제로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고, 재보수 문제가 끝난 2000년대 초중반에 다시 분데스리가 중상위권 팀으로 돌아오면서 조금씩 부활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명가 재건에는 한 끗이 부족했고, 결국 무리한 투자로 인한 재정 악화가 발목을 잡으면서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2부 리가 강등이라는 불명예를 안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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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 울리 슈타인

1980년대와 1990년대 분데스리가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 다만 선배인 하랄트 슈마허의 그림자에 가리워졌고, 보도 일그너와 안드레아스 쾨프케와 같은 쟁쟁한 후배들에게 밀려 독일 대표팀과는 그리 많은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럼에도 분데스리가에서의 경력만 놓고 보면 그는 남부럽지 않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1976년 아르미니아 빌레펠트에서 프로 데뷔한 그는 1980년 함부르크에 입단해 7시즌을 뛰면서 황금기의 수문장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도 좋은 활약을 이어오다가 1994/95 시즌 함부르크로 복귀했고, 다시 1년 뒤 빌레펠트로 돌아가 선수 생활 말년을 보냈다. 함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두 구단에서 모두 역대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손꼽히고 있고, 개인 통산으로 놓고 보면 분데스리가 역대 10번째로 많은 출전 수(512경기, 함부르크 소속으로는 228경기)를 자랑하고 있다.


CB 만프레드 칼츠

함부르크 역대 최고의 선수를 뽑을 때 젤러에 이어 2위로 고정적으로 뽑히는 인물. 비단 함부르크를 넘어 독일 역대 최고의 오른쪽 측면 수비수로 거론되고 있다(베르티 포그츠와 필립 람, 칼츠, 이렇게 3명이 독일 역대 최고의 오른쪽 측면 수비수로 불린다). 원래 오른쪽 측면 수비수이지만 상황에 따라 리베로 역할도 수행했다. '바나나 크로스(Bananenflanken)'라는 단어를 창조했을 정도로 환상적으로 감아돌아가는 킥을 자랑하는 선수로 그는 이를 바탕으로 수비수 포지션에서 뛰었음에도 많은 골(99골)을 양산해냈다. 심지어 손흥민 등장 이전 함부르크 구단 역대 분데스리가 최연소 득점 기록(만 18세 8개월 26일)도 그의 차지였다(이 기록은 손흥민에 의해 한 차례 깨졌고, 이후 현재는 바이에른에서 뛰고 있는 공격수 피테 아르프에 의해 또 깨졌다). 함부르크 유스 출신으로 1971년부터 1989년까지 뛰면서 황금기를 이끌었고, 1시즌 동안 지로댕 보르도와 뮐루즈에서 뛰면서 잠시 외도했으나 다시 함부르크로 돌아와 1990/91 시즌을 소화한 뒤 은퇴했다. 그의 시대가 저물면서 함부르크의 황금기도 함께 막을 내렸다. 함부르크 소속으로 공식 대회 724경기에 출전하면서 2위(폰 헤센 442경기)와 독보적인 차이로 구단 역대 최다 출전 수를 자랑하고 있다. 게다가 분데스리가로 국한지어놓고 보더라도 581경기로 프랑크푸르트의 전설적인 수비수 칼-하인츠 쾨르벨에 이어 역대 최다 출전 2위를 여전히 기록 중에 있다.


CB 빌리 슐츠

베켄바워 이전 독일 최고의 수비수로 명성을 떨치던 인물. 1960년 샬케에서 프로 데뷔해 1965년 함부르크로 이적했고, 이후 1973년까지 8시즌을 뛰다 은퇴했다. 강인한 일대일 수비와 침착하면서도 안정적인 수비에 더해 후방 빌드업에서도 강점을 보이면서 감독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특히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수비수 중 한 명이라는 찬사를 들었던 슐츠였다. 이것이 그가 우승과는 크게 인연이 없었음에도(1966년 월드컵 준우승, 1966/67 시즌 포칼 준우승, 1967/68 시즌 컵 위너스 컵 준우승) 함부르크 구단 역대 최고의 수비수로 칭송받는 이유이다. 다만 1970년부터 잦은 부상에 시달렸고, 결국 1973년 은퇴하기에 이르렀다.


CB 디트마르 야콥스

슐츠와 함께 함부르크 구단 역대 최고의 리베로로 뽑히는 선수. 로트-바이스 오버하우젠에서 1971년에 프로 데뷔해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과 두이스부르크를 거쳐 1979년 함부르크에 입단했다. 이후 그는 1989년까지 정확하게 10시즌을 소화하면서 함부르크 황금기 수비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그가 없는 함부르크 수비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불운하게도 1989년 9월에 있었던 베르더 브레멘과의 북독 더비에서 골과 다름 없는 슈팅을 태클로 걷어내다가 골망을 땅에 고정키는 갈고리에 등이 박히는 대형 부상을 당했고(갈고리가 제대로 잠겨져 있지 않아서 등에 박히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 결국 그대로 은퇴 수순을 밟아야 했다. 그는 함부르크 소속으로 분데스리가 323경기에 출전하면서 구단 역대 최다 출전 3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RM 케빈 키건

함부르크가 해외에서 영입한 실질적인 첫 슈퍼스타. 이미 리버풀에서 에이스로 1부 리그 우승 3회(1972/73, 1975/76, 1976/77)에 더해 UEFA컵 우승 2회(1972/73, 1975/76)에 1976/77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을 달성하면서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스타 플레이어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1977년에 함부르크에 입단한 그는 데뷔 시즌 리그 적응에 문제를 드러내면서 부진을 보였으나 1978/79 시즌 17골을 넣으면서 함부르크의 분데스리가 우승을 견인했다. 이어서 1979/80 시즌엔 팀을 유러피언 컵 결승전까지 이끌었으나 아쉽게도 준우승에 그쳤다(노팅엄 포레스트와의 결승전에서 0-1 패). 비록 그가 함부르크에서 보낸 기간은 단 3시즌 밖에 되지 않았고, 우승 트로피도 결국은 분데스리가 우승 1회가 전부였으나 그를 중심으로 함부르크는 북독을 넘어 유럽의 강자로 떠오를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1980년대 초반 황금기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괜히 마가트가 "키건이 왔을 때 함부르크의 위대한 시대가 시작됐다"라고 평가한 게 아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함부르크 시절 발롱도르 2연패(1978년과 1979년)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공격 전 포지션을 다 소화할 수 있었던 선수로 함부르크 소속 113경기에 출전해 40골을 기록했다.


CM 펠릭스 마가트

볼프스부르크 시절 구자철의 은사이자 과거 슈투트가르트와 바이에른 뮌헨, 샬케에서 감독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이전에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독일을 대표하는 최정상급 미드필더로 명성을 떨치던 인물이다. 1974년 2부 리그 구단 자르브뤼켄에서 프로 데뷔해 1976년 함부르크에 입단한 그는 1986년까지 10시즌 동안 함부르크에서 뛰면서 구단 황금기의 중추 역할을 담당했다. 그가 없는 함부르크 중원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였다(실제 함부르크 구단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로 평가받고 있다). 함부르크 데뷔 시즌(1976/77)부터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을 달성한 그는 분데스리가 우승 3회에 더해 1982/83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유벤투스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으면서 1-0 승리를 견인해 구단 황금기의 방점을 찍었다. 원래 득점력이 뛰어난 공격형 미드필더(자르브뤼켄 시절 1974/75 시즌엔 12골을, 1975/76 시즌은 17골을 넣었다)였으나 함부르크에선 살림꾼 역할에 집중했다. 그래도 1980/81 시즌엔 10골로 두자릿 수 골을 넣었고, 1981/82 시즌에도 8골을 넣으면서 팀이 필요로 할 때면 유감없이 공격 본능을 드러냈다. 함부르크 소속으로 개인 통산 383경기(구단 역대 5위)에 출전해 63골을 넣었다(분데스리가만 놓고 보면 306경기 46골).


CM 토마스 폰 헤센

파더보른 유스 출신으로 1980년에 함부르크에 입단하면서 프로 데뷔 무대를 가졌다. 이후 14시즌을 함부르크에서만 뛰면서 구단 황금기(1981/82, 1982/83 시즌 분데스리가 2연패와 1982/83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에 있어 조력자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1984/85 시즌부터 1989/90 시즌까지 6시즌 동안 평균 10골(특히 1984/85 시즌엔 15골, 1986/87 시즌엔 12골을 넣으면서 두 자릿 수 골을 달성했다)을 넣으며 '미들라이커(미드필더+스트라이커로 골 넣는 미드필더를 지칭하는 표현)'로 명성을 떨쳤다. 함부르크가 1986/87 시즌 포칼 우승을 달성하는 데 있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선수가 폰 헤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포칼 6경기 4골에 결승전 주장). 1993/94 시즌에도 14골을 넣으면서 마지막 불꽃을 태운 그는 이후 2부 리가 구단 아르미니아 빌레필트로 이적해 선수 경력을 마무리했다. 함부르크 소속으로 분데스리가 368경기에 출전해 99골 13도움을 올리면서 구단 역대 최다 출전 2위와 최다 골 2위를 동시에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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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M 게르트 되르펠

젤러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왼팔(왼쪽 측면 공격수였다). 함부르크 유스 출신으로 1960년 프로 데뷔해 12시즌 동안 활약하면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1965년엔 프랑스 스포츠 전문지 '레퀴프'로부터 유럽 최고의 왼쪽 측면 공격수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비록 분데스리가 이전 시대부터 뛰었기에 기록 면에서 다소 손해를 보는 측면이 있지만 분데스리가 224경기에 출전해 58골 47도움을 올리면서 구단 역대 최다 도움 2위(1위는 이란의 전설적인 측면 스페셜리스트 메흐디 마다비키아로 51도움)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최다 골은 팀내 역대 9위).


AM 라파엘 판 데르 파르트

1998년 1억 유로(한화 약 1321억)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들여 홈구장 재보수를 단행한 함부르크는 2000년대 초반 북독 명가의 부활을 기치로 내걸고선 대대적인 전력 보강에 나섰다. 여기에 있어 마침표를 찍는 영입이 바로 2005년 여름, 제2의 요한 크루이프라고 불리던 판 데르 파르트였다. 당시 이는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에 큰 충격을 선사하는 이적이었다. 그는 오자마자 데뷔 시즌부터 잦은 부상으로 고전했음에도 분데스리가 19경기에 출전해 9골 4도움을 올리는 뛰어난 득점 생산성을 자랑하면서 분데스리가 3위로 견인했다. 이 덕에 함부르크는 2000/01 시즌 이후 6시즌 만에 다시 챔피언스 리그 무대에 복귀할 수 있었다. 2007/08 시즌 역시 그는 두 자릿 수 골과 도움(12골 10도움)을 올리면서 함부르크를 분데스리가 4위로 견인하고선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이후 그는 토트넘을 거쳐 2012년 여름, 하위권 팀으로 몰락한 친정팀을 구하기 위해 함부르크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2012/13 시즌 5골 10도움을 올리면서 함부르크를 7위로 견인했다. 하지만 이후엔 그의 힘으로도 함부르크의 몰락(2시즌 연속 16위로 승강 플레이오프 끝에 간신히 잔류했다)을 저지할 수 없었고, 심지어 그조차도 2014/15 시즌 부진을 면치 못하다가 레알 베티스로 이적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2차 함부르크 시기에 다소 아쉬움을 남겼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는 함부르크 소속으로 199경기에 출전해 66골 55도움을 기록하면서 구단 역대 공식 대회 최다 도움 공동 2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며 개인 기록 측면에선 이름값을 해주었다.


CF 호어스트 흐루베슈

'헤딩 괴물(Das Kopfball-Ungeheuer)'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헤딩골에 있어선 분데스리가 역대 최고로 뽑히는 공격수. 188cm의 장신을 바탕으로 강력한 헤딩 슈팅을 연신 구사하면서 단순 분데스리가를 넘어 국제 무대까지 폭격하는 공격수였다. 사실 그는 만 24세 때까지만 하더라도 하부 리그에서 낚시를 취미 삼아 즐기던 무명의 선수였다. 하지만 로트 -바이스 에센에 1975년에 입단하자마자 데뷔 시즌부터 22경기에 출전해 18골을 넣으며 새로운 스타 탄생을 알린 그는 1976/77 시즌엔 20골을 넣으면서 분데스리가 정상급 공격수로 등극했다. 2부 리가로 강등된 1977/78 시즌엔 35경기에서 42골을 넣는 괴력을 과시하면서 함부르크로 이적하기에 이르렀다. 함부르크에서도 그의 득점력은 멈출 줄을 몰랐다. 다소 늦은 나이에 함부르크에 합류한 만큼(에센에서 프로 데뷔한 시점이 만 24세이고, 함부르크에 입단 시점은 만 27세였다) 오랜 기간 팀에 있을 수는 없었으나 그는 함부르크에 있는 6시즌 동안 매시즌 두 자릿 수 득점을 달성했고, 특히 1981/82 시즌엔 27골을 넣으며 분데스리가 득점왕에 오르는 영예를 맛보았다. 이렇듯 경이적인 득점 행진 덕에 그는 짧은 함부르크 경력 속에서도 젤러에 이어 구단 역대 공식 대회 최다 골 2위(133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의 활약 덕에 함부르크는 분데스리가 우승 3회(1978/79, 1981/82, 1982/83)와 1982/83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황금기를 구가했다.


CF 우베 젤러

게르트 뮐러 등장 이전 독일 최고의 공격수. 현재까지도 독일 축구사를 통틀어 뮐러에 이어 역대 2위의 공격수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함부르크 유스 출신으로 1953년 프로 데뷔해 1972년까지 무려 19시즌 동안 활약했다. 게다가 독일 올해의 선수에만 무려 3차례(1960, 1964, 1970) 오르면서 프란츠 베켄바워(4회)에 이어 역대 2번째로 많은 수상을 자랑하고 있고, 각종 대회에서 무려 11번의 득점왕을 달성했다. 분데스리가 초대 득점왕(1963/64 시즌 30골)의 주인공 역시 젤러이다. 하지만 그의 선수 경력 중 절반 이상이 분데스리가 이전 시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게 아쉬운 부분. 그럼에도 그는 함부르크 원클럽맨으로 분데스리가만으로 국한 짓더라도 137골로 구단 역대 최다 득점자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함부르크의 신앙이자 유일신이자 신성 불가침의 영역에 위치하고 있다. 괜히 그가 '우리의 우베(Uns Uwe)'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이렇게까지 한 명의 선수가 구단 역사에 있어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건 독일에선 젤러가 유일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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