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버지 박지성 그리고 이영표의 동료로 유명했던 마테야 케즈만
▲ PSV 시절 리그 정상급 공격수로 꼽혔지만, 첼시 이적 후 급격히 부진 빠져
▲ 2012년 현역 은퇴 이후에는 에이전트로 변신
[골닷컴] 박문수 기자 = 한 때 네덜란드 리그는 월드 클래스 공격수 등용문이었다. 그 중 PSV 출신 공격수들은 소위 말하는 한 시대를 지배한 공격수들이었다. 호마리우와 호나우두 그리고 뤼트 판 니스텔로이가 대표적인 예시다.
케즈만도 이 중 하나가 될 뻔했다. 게다가 케즈만의 경우 해외축구의 아버지로 불리는 박지성 그리고 이영표의 동료였다. 국내에서 PSV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덩달아 주목받은 선수다. 다만 이 선수 높은 인지도에도, 국내에서는 알아보는 이가 없어 일명 '용산 굴욕'의 주인공이 됐다. 축구 팬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접했을 것이다.
첼시 이적 후 케즈만의 커리어는 게 꼬여버렸다. 같이 이적한 로번은 월드 클래스 재능을 입증하며, 지난해 현역 은퇴를 선언했지만, 케즈만의 경우 여러 클럽을 전전한 끝에 홍콩 리그에서 유니폼을 벗었다.
이러한 이유로 케즈만은 네덜란드 리그에서 빅리그 진출 이후 실패한 공격수의 교과서 같은 선수가 됐다. 나쁜 의미로.
이번 축구계 슈가맨을 찾아서 7번째 선수는 바로 케즈만이다. 유럽 최고 공격수에서 반짝스타로 전락한 케즈만은 어떤 선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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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즈만은 누구?
1979년생이다. 세르비아 제문 출신이다.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받으며, 1996/1997시즌 17세의 나이로 FC 라드니츠키 피로트에서 프로 데뷔했다. 이후 1998년에는 세르비아의 명문 파르티잔으로 이적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기 시작했다. 터닝 포인트가 된 건 2000년 여름 PSV 이적 이후다. 첫 시즌 득점왕을 차지한 데 이어, 세 차례나 네덜란드리그 득점왕에 오르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박지성 그리고 이영표와의 호흡도 좋았다. 덕분에 한때 케즈만은 국내 축구 팬들 사이에서 '월드 클래스 자질을 갖춘 공격수'로 불렸다.
잘 나갔지만, 첼시 이적 이후 꼬였다. 첼시 9번의 저주 그리고 네덜란드 리그 득점왕 출신 공격수들의 잔혹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수가 됐다.
첼시에서 실패한 이후 케즈만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페네르바흐체 그리고 PSG 등 여러 클럽에서 뛰었지만, PSV 시절만큼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2012년 홍콩의 사우스 차이나AA 생활을 끝으로 축구화를 벗었다.
Getty# 선정 이유?
순식간이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졌고, 올라서지 못했다. 불운의 공격수 대표 아이콘이다. 케즈만의 경우, 2000년대 초반 박지성과 이영표의 PSV 이적 이후 국내 축구 팬들 사이에서 가장 회자되던 공격수다. 대한민국 축구 레전드들의 동료이자, 히딩크 감독 지휘 아래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금방이라도 월드 클래스 공격수가 될 것 같았다.
앞서 말한 첼시 9번의 저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수가 됐다. 호마리우와 호나우두 그리고 판 니스텔로이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활약이 기대됐던 선수지만 단 한 번의 이적으로 모든 게 꼬였고, 금방 잊혔다. 여기에 일명 용산 굴욕 사건으로 여전히 축구 팬들 사이에서 거론되고 있다.
# 전성기는 언제
PSV 시절이 최고 전성기다. 두 번의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우승은 물론, 2000/2001시즌과 2002/2003시즌 그리고 2003/2004시즌까지 무려 세 차례나 에레디비지에 득점왕을 차지했다. 에리디비지에 통산 122경기에서 105골을 가동했다. 메날두 때문에 눈이 높아져서 그렇지, 이 정도면 어마어마한 기록이다. 컵대회까지 포함하면 176경기에서 129골을 가동했다.
그러나 케즈만 이후, 네덜란드 리그 출신 공격수들의 활약상은 다소 미미했다. 대표적인 선수가 케즈만이다. 이후 아폰수 아우베스와 클라스 얀 훈텔라르 그리고 비센트 얀센이 빅리그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윌프레드 보니 또한 네덜란드 리그 득점왕 출신이다. 스완지에서는 느낌표였지만, 맨체스터 시티에서는 물음표였다. 데파이 또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는 부진했지만, 올랭피크 리옹 이적 이후에는 비로소 잠재력을 터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나마 훈텔라르는 레알 마드리드와 AC 밀란에서와 달리 샬케 04에서는 부활에 성공했다. 예외도 있다. 2009/2010시즌 네덜란드 리그 득점왕 루이스 수아레스는 아약스에서 이름을 알렸고, 리버풀을 거쳐 현재도 소위 말하는 월드 클래스 공격수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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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커리어는?
파르티잔 시절이었던 1998/1999시즌 구유고슬라비아 1부리그에서 우승컵을 차지했다. PSV에서는 두 번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고, 먹튀로 불린 첼시에서도 2004/2005시즌 무리뉴 감독 부임과 함께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다만 후보였다. 페네르바흐체에서도 2006/2007시즌 터키 슈퍼리그 우승에 성공했고, 24경기에 나와 9골을 가동했다.
2008년 여름에는 PSG로 둥지를 옮겼지만, 별다른 활약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중간에는 제니트로 임대 이적했지만,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심지어 2010/2011시즌에는 홍콩 1부리그 팀인 사우스 차이나 유니폼을 입기도 했다. 2011년 벨라루스 명문 구단인 바테 입단으로 유럽 무대 재도전에 나섰지만, 부진은 계속됐다. 결국 2012년 사우스 차이나에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AA# 최근 근황은?
선수 생활 말년보다 오히려 은퇴 이후 더욱 자주 거론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라치오의 세르비아 거인 플레이메이커 세르게이 밀린코비치-사비치의 에이전트가 바로 케즈만이다. 밀린코비치-사비치 자체가 나이도 어린 데, 내로라하는 빅클럽들의 구애를 받는 선수인 만큼 그의 이적설이 나올 때마다 따라다니는 이름이 바로 케즈만이다.
# 축구계 슈가맨을 찾아서 다음 주자는 누구?
특이한 이력의 선수이다. 무명 시절에는 아시아에서 뛴 적이 있다. 빅리그 득점왕까지 차지했던 선수지만, 당시 그의 포지션은 측면 수비수였다. 자국 리그 복귀 이후 잠재력을 터뜨렸다. 뒤늦게나마 축구에 눈을 떴다는 평을 받으며, 2006년 여름 프랑스 리그로 둥지를 옮겼고, 1년 만에 빅리그 입성에 성공한다.
리그 2년 차에는 득점왕을 차지했고, 활약상을 인정받아 남아공 월드컵에도 소집됐다. 참고로 슈가맨 1회차에서 소개한 선수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월드컵 출전에 성공했다. 다만 백업이었다. 그러나 월드컵 이후에는 다소 미미한 활약으로 중동으로 둥지를 옮겼고, 2017년 자국 2부리그에서 현역 은퇴했다.
그래픽 = 박성재 디자이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