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번째 역대 베스트 팀으로 선정했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 이어 레버쿠젠 역시 한국이 자랑하는 전설적인 공격수 차범근의 친정팀으로 국내 축구팬들에게 친숙한 팀이다. 게다가 레버쿠젠은 손흥민이 토트넘으로 이적하기 전 소속팀이기도 했다.
레버쿠젠은 1978/79 시즌 2부 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승격한 이래로 41시즌째를 분데스리가에서 보내고 있다. 분데스리가 터줏대감인 다른 구단들과 비교하면 비교적 분데스리가 역사 자체가 부족한 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레버쿠젠은 유럽 축구가 글로벌화되어가는 시점이었던 1990년대 중반부터 꾸준하게 중상위권에서 상위권을 오가면서 분데스리가 팀들 중에선 나름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올 수 있었다.
이는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레버쿠젠은 비교적 짧은 분데스리가 역사 속에서도 누적 승수(597승)와 승점(2169점) 10위에 올라있다. 더 놀라운 점은 통산 승률에 있어서 바이에른 뮌헨(59.6%)과 RB 라이프치히(53.5%), 보루시아 도르트문트(44.7%)에 이어 4위라는 데에 있다. 무엇보다도 통산 골득실에 있어선 +478골로 바이에른(+2079골)과 도르트문트(+681골)에 이어 당당히 3위에 올라있다. 라이프치히는 이제 구단 통산 분데스리가 127경기 밖에 소화하지 못한 신생 구단이기에 논외로 친다면 분데스리가 역사에선 바이에른과 도르트문트에 이어 가장 꾸준하게 호성적을 낸 팀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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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레버쿠젠의 단점은 바로 우승 트로피에 있다. 20년 넘게 꾸준하게 상위권을 유지했으면서도 정작 분데스리가 우승은 전무하다. 준우승만 5번이다. 기타 컵 대회까지 모두 합치더라도 1987/88 시즌 UEFA컵(유로파 리그 전신) 우승과 1992/93 시즌 DFB 포칼(독일 FA컵) 우승이 전부다. 심지어 2001/02 시즌엔 챔피언스 리그와 포칼 결승전에 진출했고, 분데스리가 32라운드까지 1위를 달리고 있었으나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서 트리플 러너업(메이저 3개 대회 준우승)에 그치는 불운을 맛봐야 했다.
이에 독일에선 레버쿠젠을 가리켜 '비체쿠젠(Vizekusen: 독일어로 준우승을 의미하는 Vize와 레버쿠젠을 합친 합성어)' 내지는 '네버쿠젠(영어 Never와 레버쿠젠을 합친 합성어로 절대 우승 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라는 다소 조롱 섞인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
비교적 분데스리가 역사는 짧은 편이지만 그래도 나름 스타 선수들을 다수 배출한 레버쿠젠 역대 베스트 일레븐을 소개하도록 하겠다(차범근 선수는 이미 프랑크푸르트 역대 베스트 일레븐에 포함시켰기에 아쉽게도 제외했다).
https://www.buildlineup.com/
GK 뤼디거 폴보른
이번 베스트 일레븐에 이름을 올린 선수들 중 유일한 레버쿠젠 원클럽맨. 레버쿠젠 자체가 소도시에 가깝다 보니 재능 있는 선수들을 수집해서 키운 후 판매하는 전통이 있다 보니 원클럽맨을 찾아보기 힘든 구단이다. 하지만 폴보른은 유스 출신으로 레버쿠젠에서만 분데스리가 400경기 이상을 소화했다(401경기). 당연히 팀 내 최다 출전 선수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레버쿠젠 선수들 중에서 유일하게 UEFA컵 우승(1987/88)과 포칼 우승(1992/93)을 동시에 차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점들이 그가 레버쿠젠 팬들 사이에서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이다.
CB 루시우
레버쿠젠의 컬트 히어로. 짧은 기간이지만 큰 임팩트를 남기면서 레버쿠젠에서 역대 가장 사랑받는 인물로 등극했다. 2001년 1월, 브라질 명문 인터나시오날을 떠나 레버쿠젠에 입단한 그는 팀의 핵심 수비수로 활약하면서 2001/02 시즌 트리플 러너업의 중추 역할을 담당했다. 비록 준우승에 그쳤으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골에 이어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브라질 대표팀 소속으로 우승까지 차지하면서 주가를 높였으나 많은 명문 클럽들의 러브콜에도 잔류를 선택한 그는 전반기 막판 심각한 부상을 당해 장기간 결장했음에도 29라운드에 복귀해 당시 강등권에 있었던 팀을 기적처럼 구해내는 맹활약을 펼치기도 했다(실제 레버쿠젠은 32라운드까지 강등권에 있었으나 마지막 2경기에서 모두 승리하면서 극적으로 잔류했다). 이어진 2003/04 시즌, 그는 팀을 분데스리가 3위로 견인하면서 챔피언스 리그 진출 티켓을 선물하고 바이에른으로 떠났다. 이것이 그가 바이에른으로 이적했음에도 레버쿠젠 팬들에게 지속적으로 사랑을 받은 주된 이유였다. 바이에른 소속으로 처음 나섰던 레버쿠젠 원정에서도 그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긴 대형 걸게들이 대거 걸려있었을 정도다.
CB 옌스 노보트니
칼스루어 유스 출신으로 올리버 칸, 메멧 숄과 함께 유망주로 이름을 알리다 1996년 레버쿠젠에 입단했다. 이후 그는 분데스리가 정상급 수비수로 자리잡으며 마티아스 잠머의 뒤를 잇는 리베로로 명성을 떨쳤다. 그가 가세하면서 레버쿠젠이 분데스리가 상위권 단골 손님으로 자리매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실제 1998/99 시즌부터 2001/02 시즌까지 4시즌 연속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연달아 뽑히며 당대 독일 최고의 수비수로 자리잡아나갔다. 하지만 트리플 러너업을 달성했던 2001/02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2차전에서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끔찍한 부상을 당해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과 포칼 결승전은 물론 2002년 한일 월드컵 불참으로 이어졌다(노보트니만 있었어도 레버쿠젠이 우승 트로피 하나는 최소 들 수 있었다는 전망이 지배적일 정도로 그의 영향력을 컸다). 2002/03 시즌 후반기 개막전(18라운드)에 돌아온 그는 하필 복귀전에 또다시 십자인대 파열이 재발하는 불상사가 있었다. 결국 레버쿠젠은 노보트니의 공백을 드러내면서 많은 실점을 허용하는(56실점으로 최다 실점 공동 4위) 부진 속에 강등권을 전전해야 했다. 끔찍한 부상의 악몽에서 돌아온 그는 2003/04 시즌 후반기부터 2004/05 시즌 전반기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뛰면서 다시금 수비의 핵심을 잡아주었으나 2005년 2월 19일 뉘른베르크전에 다시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불상사가 발생했고, 결국 2005/06 시즌을 마지막으로 레버쿠젠과 작별을 고했다.
CB 크리스티안 뵈른스
뵈른스하면 도르트문트 레전드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스타덤에 오르면서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던 시기는 다름 아닌 레버쿠젠 소속이었을 때였다(정작 도르트문트에선 하향세를 타던 시기였다). 발드호프 만하임 유스 출신으로 프로 데뷔한 그는 1991년 여름, 레버쿠젠에 입단했다. 이후 그는 1998년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하기 전까지 핵심 수비수로 활약하면서 1992년 독일 대표팀 승선에 성공했고, 1992/93 시즌 포칼 우승을 견인하며 주가를 높였다. 특히 1995/96 시즌부터 1997/98 시즌까지는 3시즌 연속 키커지 선정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이름을 올리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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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 카르스텐 라멜로프
레버쿠젠의 지속적인 상위권 진입 및 트리플 러너업에 있어 숨은 공로자. 1996년 1월, 당시 2부 리가에 있었던 헤르타 베를린에서 이적해온 그는 이후 12년 6개월 동안 레버쿠젠의서 중추로 자리잡으면서 437경기에 출전해 구단 역대 최다 출전 5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기술적인 세련미는 떨어지는 편이었으나 단단한 수비와 성실성을 바탕으로 궂은 일을 해주었고, 특히 노브트니와 루시우가 장기 부상으로 떠나있었을 당시 수비수로 뛰면서 버팀목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2002년 한일 월드컵에선 독일 대표팀에서도 노보트니 대신 수비수로 뛰면서 준우승에 기여했다). 부주장이었으나 주장인 노보트니가 잦은 부상으로 결장했기에 실질적인 주장이나 다름없었다.
RM 베른트 슈나이더
레버쿠젠이 자랑하는 미드필더. 2부 리그 구단 칼 차이스 예나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1999년 레버쿠젠에 입단한 그는 10시즌을 뛰면서 팀의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빠른 스피드와 '하얀 브라질리언(White Brazilian)'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드리블 기술에 더해 정교한 킥으로 많은 공격 포인트를 양산해냈다. 이를 바탕으로 2001/02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서 최다 도움(5도움)을 올리면서 레버쿠젠의 트리플 러너업에 크게 기여했다. 레버쿠젠 소속으로 개인 통산 366경기에 출전해 52골 80도움을 올리면서 구단 역대 최다 도움 기록자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CM 미하엘 발락
레버쿠젠 준우승에 있어 상징과도 같은 비운의 선수. 1997/98 시즌, 혜성처럼 등장해 승격팀 카이저슬라우턴의 분데스리가 우승 이변에 기여하면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분데스리가 데뷔 시즌을 보낸 그는 1999년 레버쿠젠으로 이적해왔다. 그의 이적 첫 시즌 레버쿠젠은 33라운드까지 1위를 달리고 있었으나 운터하힝과의 34라운드 최종전에서 발락의 자책골로 마지막 순간 2위로 내려앉았다. 2001/02 시즌엔 미드필더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공격 생산성을 자랑하면서 분데스리가에서만 17골 8도움을 올리는 괴력을 과시했으나 베르더 브레멘과의 32라운드에서 발락이 얻어낸 페널티 킥을 한스-외르크 부트(골키퍼지만 페널티킥 전담키커로 명성을 떨쳤다)가 실축하는 우를 범하면서 1-2 역전패를 당해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분데스리가 역전 우승을 내주었고, 레알 마드리드와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도 지네딘 지단의 환상적인 발리 슈팅 결승골을 바로 지척에서 지켜봐야 했다. 이어진 2002년 월드컵에서도 한국과의 준결승전에서 골을 넣으며 결승 진출을 이끌었으나 경고 누적으로 결승전에 결장하면서 벤치에서 팀이 무기력하게 패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비록 모든 대회에서 다 준우승에 그치는 불운을 맛보았으나 애당초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성과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독일 올해의 선수에 선정됐다. 여담으로 그는 이후 첼시에서 다시 한 번 2007/08 시즌 4개 대회 준우승(커뮤니티 실드, 칼링컵, 프리미어 리그, 챔피언스 리그) 포함 유로 2008에서도 준우승에 그치며 2002년의 악몽을 되풀이했다. 그는 선수 경력 마지막에 레버쿠젠으로 돌아와 2시즌을 뛰었으나 로빈 두트 감독과의 마찰로 다소 씁쓸한 마무리를 맞이해야 했다.
LM 제 호베르투
지금은 오랜 기간 선수 경력을 이어오면서 자기 관리의 화신으로 불리지만 레버쿠젠 시절의 그는 뛰어난 발재간과 정교한 크로스를 자랑하는 전형적인 측면 미드필더였다. 실제 그가 레버쿠젠에서 뛴 기간은 4시즌이 전부였으나 150경기에 출전해 19골 42도움을 올리면서 특급 도우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특히 레버쿠젠이 트리플 러너업을 기록했던 2001/02 시즌 그는 분데스리가에서만 17도움을 기록하면서 도움왕에 등극했다. 이러한 활약상을 인정받아 그는 발락과 함께 2002년 여름, 당시 구단 역대 최고 이적료인 950만 유로(한화 약 119억)로 바이에른으로 이적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그는 2007년부터 수비형 미드필더로 변신에 성공했고, 철저한 몸관리를 바탕으로 만 43세까지 선수 경력을 이어갔다.
CF 울프 키르스텐
레버쿠젠 역대 최고의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공격수. 구동독 디나모 드레스덴 소속으로 만 24세의 나이에 1990년 동독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면서 주가를 높인 그는 1990년 독일 통일과 동시에 레버쿠젠에 입단했다. 이후 그는 레버쿠젠에서만 13시즌을 뛰면서 간판 공격수로 명성을 떨쳤다. 1992/93 시즌 20골을 넣으면서 개인 통산 첫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차지한 그는 1993/94 시즌 UEFA 컵 위너스 컵 득점왕(5골)에 이어 1994/95 시즌 UEFA컵 득점왕(10골)을 차례대로 기록했다. 이어서 1996/97 시즌과 1997/98 시즌엔 연달아 22골을 넣으면서 두 시즌 연속 분데스리가 득점왕에 오르는 영예를 얻었다. 심지어 선수 경력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2001/02 시즌 역시도 그는 만 36세의 나이에 공식 대회 49경기에 출전해 17골(분데스리가 11골, 챔피언스 리그 3골, 포칼 3골)을 넣으며 트리플 러너업에 기여했다. 공식 대회 446경기(구단 역대 2위)에 출전해 238골 50도움을 올리면서 구단 역대 최다 골 기록자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CF 슈테판 키슬링
2010년대 분데스리가를 대표하는 장신 공격수(하지만 요아힘 뢰브 독일 대표팀 감독의 외면을 받은 비운의 선수). 뉘른베르크 유스 출신으로 프로 데뷔해 2005/06 시즌 분데스리가에서 10골을 넣으면서 잠재력을 보여준 그는 2006년 여름, 레버쿠젠으로 이적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그는 2006년부터 2018년까지 12시즌 동안 레버쿠젠의 간판 공격수로 활약했다. 특히 2009/10 시즌 21골로 분데스리가 득점 2위(당시 득점왕은 볼프스부르크 공격수 에딘 제코로 22골이었다)를 차지한 데 이어 2012/13 시즌엔 25골로 당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간판 공격수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24골)를 제치고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많은 구단들의 러브콜을 받았음에도 그는 팬들과 구단의 잔류 요청을 받아들여 평생 레버쿠젠에 남겠다는 선언을 했고, 팬 서비스가 좋기로 소문이 났기에 루시우 이후 레버쿠젠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선수로 등극했다. 레버쿠젠 소속으로 공식 대회 444경기(최다 출전 4위)에 출전해 162골 75도움으로 최다 골 2위와 최다 도움 2위를 동시에 기록하고 있다.
CF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백작'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우아한 볼 컨트롤과 기술을 자랑하던 공격수. 2001년 1월, 만 19세의 어린 나이에 CSKA 소피아에서 레버쿠젠으로 이적해온 그는 2006년까지 5년 6개월 동안 뛰면서 인상 깊은 활약을 펼쳤다. 데뷔 초기 아직 어린 나이다 보니 2군과 1군을 오면서 독일 무대에 적응해 나간 그는 2001/02 시즌 공식 대회 41경기에 출전해 16골(분데스리가 8골)을 기록하면서 레버쿠젠의 트리플 러너업에 기여했다. 실질적으로 키르스텐의 백업이었으나 교체 출전할 때마다 경기를 뒤집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기대감을 한층 높인 베르바토프였다. 비록 2002/03 시즌 지독한 2년차 슬럼프에 빠지면서 레버쿠젠의 부진에 일조했으나 2003/04 시즌 분데스리가에서만 16골 9도움을 올린 데 이어 2004/05 시즌과 2005/06 시즌 2시즌 연속 20골 고지를 넘어서면서 분데스리가 정상급 공격수로 자리잡았다. 참고로 레버쿠젠 소속으로 분데스리가에서 2시즌 연속 20골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키르스텐과 베르바토프 둘 밖에 없다. 이러한 활약상을 인정받아 그는 2006년 여름, 1600만 유로(한화 약 212억)의 이적료와 함께 토트넘으로 이적했다. 레버쿠젠 소속으로 출전 경기수는 202경기로 그리 많은 편에 속하지 않지만 91골로 키르스텐과 키슬링에 이어 최다 골 3위에 올라있다. 공격 포인트(골+도움) 역시 125개로 키르스텐(288개)과 키슬링(237개), 슈나이더(132개)에 이어 4위를 차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