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z Beckenbauer & Gunter NetzerBeyond The Last Man

'네처-잠머-젤러' 비 바이에른 선수 베스트 일레븐

독일 분데스리가는 기본적으로 바이에른과 바이에른이 아닌 팀으로 역사가 이루어져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이는 지난 분데스리가 56시즌 중 정확하게 절반에 해당하는 28시즌 동안 바이에른이 우승을 독점했다는 데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독일에선 국민 절반이 바이에른 팬이고 나머지 국민 절반은 바이에른 안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당연히 바이에른은 독일의 내로라하는 스타 플레이어들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바이에른의 러브콜을 거절한 안티 바이에른의 선봉자에 있었던 선수들도 있기 마련. 그러하기에 이번 기회에 비 바이에른 선수 베스트 일레븐을 선정해 보았다. 독일 역대 최고의 스토퍼 위르겐 콜러나 쾰른의 전설적인 골키퍼 하랄트 슈마허(바이에른 소속으로 8경기 출전했다) 같이 잠시라도 바이에른에서 뛴 경력이 있는 선수들은 모두 해당 명단에서 제외했다.

Anti Bayern Best Eleven


GK 안드레아스 쾨프케(뉘른베르크 포함 6개 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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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마이어와 하랄트 슈마허, 보도 일그너의 계보를 잇는 1990년대 중후반 독일 대표팀 주전 골키퍼(그 뒤를 올리버 칸과 옌스 레만, 마누엘 노이어가 차례대로 잇고 있다). 대기만성형 골키퍼로 선수 경력 초창기에 이재성의 소속팀 홀슈타인 킬을 시작(킬 태생으로 유스 출신이다)으로 샤를로텐부르크와 헤르타 베를린(그가 뛰던 당시 헤르타는 2부 리가 구단이었다)을 거쳐 만 23세인 1986년 여름에 들어서야 뉘른베르크에 입단하면서 분데스리가 데뷔 시즌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뉘른베르크에 오자마자 분데스리가 최정상급 골키퍼로 활약하면서 1987/88 시즌과 1992/93 시즌, 1994/95 시즌 분데스리가 베스트 일레븐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고, 특히 1993년엔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유로 1996 우승을 견인하면서 1996년 유럽 최고의 골키퍼에 선정되는 영예를 얻었다. 선수 생활 은퇴 후 그는 2004년부터 독일 대표팀 골키퍼 코치직을 장기간 수행하면서 후배 골키퍼들의 버팀목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RB 베르티 포그츠(묀헨글라드바흐)

독일 역대 최고의 오른쪽 측면 수비수는? 요즘은 필립 람을 많이들 떠올리겠지만 람 이전에 포그츠가 있었다. 수비수 포지션으로는 프란츠 베켄바워(4회)와 마티아스 잠머(2회)와 함께 2회 이상 독일 올해의 선수(1971, 1979년)에 선정되는 영예를 얻었을 정도다. 기본적으로 그는 '테리어(사냥개)'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대인 수비를 자랑하면서 169cm의 단신임에도 상대 에이스 킬러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열린 네덜란드와의 결승전에선 당대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 요한 크루이프를 전담마크하면서 우승을 견인했다. 묀헨글라드바흐 원클럽맨으로 528경기에 출전하면서 구단 역대 최다 출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당대 언론들은 베켄바워의 라이벌로 네처를 많이 거론했으나 실질적인 라이벌은 포그츠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네처는 황금기의 초석만 마련하고 레알 마드리드로 떠난 반면 그는 네처가 떠나고도 분데스리가 우승 3연패(1974/75, 1975/76, 1976/77)와 UEFA컵(유로파 리그 전신) 우승 2회(1974/75, 1978/79)를 견인하며 실질적인 구단 최전성기를 이끌어냈다. 그가 은퇴하자 10년을 이어져오던 구단의 황금기가 막을 내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포그츠가 곧 묀헨글라드바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CB 마티아스 잠머(도르트문트 포함 4개 구단)

베켄바워에 이어 독일 역대 최고의 수비수 2위로 자주 거론되는 선수. 원래 이미 디나모 드레스덴에서 천재 공격형 미드필더 소리를 들으며 구동독 시대 마지막 스타 플레이어로 자리잡았던  그는 통독 이후 슈투트가르트에서 2시즌 연속(1990/91 시즌 11골 7도움, 1991/92 시즌 9골 5도움) 맹활약을 펼치면서 분데스리가 무대에서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활약상을 인정받아 1992년 여름, 인테르로 600만 유로에 이적했으나 그는 향수병을 호소하면서 6개월 만에 도르트문트 이적과 함께 독일로 복귀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도르트문트에 입단하자마자 단 반 시즌 만에 두 자릿 수 골(17경기 10골)을 넣는 괴력을 과시하면서 에이스로 군림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당시 도르트문트 감독 오트마르 히츠펠트의 조언을 듣고 1993/94 시즌부터 리베로로 보직을 변경했고, 베켄바워의 뒤를 잇는 명 수비수로 명성을 떨치면서 도르트문트의 황금기를 견인했다. 1995년과 1996년엔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연달아 수상했고, 특히 유로 1996에서 독일의 우승을 견인한 공로를 인정받아 당시 수비수로는 베켄바워에 이어 역대 2번째로 발롱 도르를 수상하는 영예를 얻으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절정의 순간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고생했고, 부상을 안고 출전을 감행한 1996/97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팀에 우승을 선사했으나 부상 부위가 악화되는 악재가 따르면서 1997년 10월 4일, 아르미니아 빌레펠트와의 분데스리가 경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그라운드에 돌아올 수 없었다.


CB 칼하인츠 푀르스터(슈투트가르트/마르세유)

슈투트가르트 구단 역대 최고의 수비수를 넘어 위르겐 콜러와 함께 독일 역대 최고의 스토퍼(리베로가 수비 라인 조율에 더 집중한다면 스토퍼는 앞선에서 상대 공격을 차단하는 수비 스페셜리스트를 지칭한다)로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선수. 유로 1980 우승 당시 독일 대표팀 핵심 수비수로 당대 세계에서 가장 대인 수비 능력이 뛰어난 수비수로 명성을 떨쳤다. 슈투트가르트 유스 출신으로 1977년에 데뷔해 1986년까지 9시즌 동안 핵심 수비수로 활약했다. 특히 1983/84 시즌엔 구단 최초의 분데스리가 우승을 견인해 슈투트가르트 선수로는 처음으로 독일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는 영예를 얻었다. 이후 그는 프랑스 명문 올랭피크 마르세유로 이적해 선수 경력의 마지막을 보냈다. 슈투트가르트 소속으로 공식 대회 364경기에 출전했다(구단 역대 8위).


LB 한스-피터 브리겔(카이저슬라우턴 포함 3개 구단)

독일 축구 역사상 최강에 해당하는 피지컬과 파워를 자랑하던 멀티 플레이어. 그는 원래 십대 때까지만 하더라도 1972년과 1973년 독일 청소년 대표에서 멀리뛰기와 삼단뛰기 신기록 보유자였고, 철인10종 경기에도 두 차례 참가한 경력이 있다. 이로 인해 그는 다른 축구 선수들 보다 다소 늦은 만 17세에 축구를 처음 접했고, 만 20세에 카이저슬라우턴에서 분데스리가 데뷔전을 치렀다. 원래 그는 공격수로 시작했으나 축구를 늦게 접하면서 기술적인 완성도가 떨어졌기에 선수 생활 초창기에는 수비수 포지션에서 주로 활약했다(특히 왼쪽 측면 수비수와 수비형 미드필더를 주로 수행했다). '팔츠의 롤러차(Walz aus der Pfalz)'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압도적인 피지컬을 바탕으로 상대를 파괴해 나갔다. 게다가 그는 경험이 쌓이면서 기술적으로도 완성도를 쌓아가면서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한 선수로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1984년엔 이승우의 전 소속팀으로 국내 축구팬들에게도 친숙한 헬라스 베로나로 이적해 공격 쪽 포지션에서 활약하면서 1984/85 시즌 세리에A 우승을 견인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이는 헬라스 베로나 구단 첫 세리에A 우승으로 당시 이탈리아 무대엔 디에고 마라도나를 필두로 미셸 플라티니, 지쿠, 칼-하인츠 루메니게와 같은 스타들이 즐비해 있었다. 당연히 레스터 시티 동화와 비견될 만한 놀라운 성과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1985년 독일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는 영예를 얻었다.


DM 라이너 본호프(묀헨글라드바흐 포함 4개 구단)

묀헨글라드바흐 구단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 수비수도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수비력을 갖추고 있는 데다가 강력한 중거리 슈팅을 자랑하는 선수였다. 1970년 묀헨글라드바흐에서 데뷔해 1978년까지 뛰면서 황금기를 구가했다(현재도 묀헨글라드바흐 부회장직을 수행 중에 있다). 비록 1978년 발렌시아로 이적하면서 하향세를 탔으나 그래도 1970년대를 대표하던 미드필더였다. 이는 그가 독일 선수로는 유일하게 유로 우승 2회와 월드컵 우승을 동시에 차지한 선수라는 데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1972 유로, 1974 월드컵, 1980 유로). 그가 버티고 있었기에 네처와 오베라트, 한지 뮐러 같은 선수들이 마음 놓고 플레이메이킹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CM 볼프강 오베라트(쾰른)

쾰른의 상징 그 자체. 바이에른 뮌헨에 프란츠 베켄바워(+게르트 뮐러),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에 베르티 포그츠(+귄터 네처), 함부르크에 우베 젤러가 있다면 쾰른엔 오베라트가 있다. 1974년 월드컵 우승 당시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수행하면서 독일의 우승에 있어 중책을 담당했다. 그의 존재로 인해 묀헨글라드바흐가 자랑하는 천재 플레이메이커 네처가 1972년과 1973년 독일 올해의 선수 2연패를 달성하고도 벤치를 지켜야 했다. 그의 업적은 독일 대표팀에서도 위대하지만 쾰른에선 한층 더 빛을 발하고 있다. 1962년 프로 데뷔해 1977년까지 15년 동안 원클럽맨으로 활약하면서 분데스리가 초대 우승(1963/64) 및 포칼 우승 2회(1967/68, 1976/77)에 크게 기여했다. 하랄트 슈마허에 이어 구단 통산 최다 출전 2위(531경기)에 더해 111골 82도움으로 구단 역대 최다 도움 기록자로 아직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다. 분데스리가 역대로 따지더라도 최다 도움 8위에 당당히 올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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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W 위르겐 그라보브스키(프랑크푸르트)

프랑크푸르트 원클럽맨이자 구단 역대 최고의 선수로 추앙받는 전설. 프랑크푸르트에선 그에 대한 찬가가 있을 정도로 사실상 종교와도 같은 위상을 가진 선수다. 1965년에 프랑크푸르트 1군에 입단해 1980년 은퇴할 때까지 분데스리가 최정상급 선수로 활약했다. 독일을 대표하는 멀티 플레이어로 선수 생활 초기엔 공격수였으나 공격형 미드필더와 측면 공격수로 서서히 내려왔고, 선수 생활 말년엔 중앙 미드필더로 변신하면서 정상급 기량을 오랜 기간 유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는 축구 선수로는 황혼기에 해당하는 만 35세의 나이(1979/80 시즌)에도 매경기 풀타임을 뛰면서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했다. 하지만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와의 분데스리가 25라운드에서 당시 신인이었던 로타르 마테우스의 거친 태클에 큰 부상을 당해 안타깝게 은퇴 수순을 밟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프랑크푸르트는 UEFA컵 결승전에서 마테우스의 묀헨글라드바흐를 꺾고 구단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유럽 대항전 우승을 차지하면서 은퇴하는 그라보브스키에게 큰 선물을 선사했다는 데에 있다. 프랑크푸르트 구단 역대 최다 출전 2위(516경기)이자 최다 도움 기록자(74도움)이며, 최다 득점에도 4위(127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독일 대표팀에서도 중추로 활약하면서 유로 1972와 1974년 서독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다.


AM 귄터 네처(묀헨글라드바흐 포함 3개 구단)

독일 불세출의 천재 플레이메이커. 센티미터 단위로 패스를 조절할 수 있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정교한 패스를 자랑했다. 특히 묀헨글라드바흐 에이스로 1969/70 시즌과 1970/71 시즌 분데스리가 2연패를 이끌면서 바이에른 상징 프란츠 베켄바워와 함께 치열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하지만 그의 천재적인 플레이에도 수비 가담 부족 문제로 인해 결국 대표팀에선 유로 1972 우승 이후 중용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남겼다(1974년 월드컵에도 참가하긴 했으나 1경기 교체 출전에 그쳤다). 그럼에도 그는 묀헨글라드바흐에서만큼은 1963년부터 1973년까지 10년간 에이스로 군림하면서 개인 통산 349경기(구단 역대 8위)에 출전해 129골(구단 역대 3위) 73도움(구단 역대 최다)을 기록했다. 독일 올해의 선수에도 1972년과 1973년 2회 연속 선정되는 영예를 얻었다. 특히 1972/73 시즌 DFB 포칼 결승전에서의 영웅적인 활약상은 아직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역대 최고의 포칼로 평가받는 경기다. 이는 하단에 따로 주석으로 소개하도록 하겠다). 아직까지도 독일에선 베켄바워의 최대 라이벌을 뽑으라고 한다면 그를 많이들 거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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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 마르코 로이스(도르트문트 포함 3개 구단)

쟁쟁한 레전드 선배들을 제치고 과감하게 선택했다. 그도 그럴 법한 게 그는 분데스리가 기준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11시즌을 뛰면서 127골 80도움을 기록하면서 역대 최다 골 25위와 최다 도움 9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는 현역 선수 기준 최다 골 1위이자 최다 도움 2위(1위는 토마스 뮐러 140도움)에 해당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독일 올해의 선수에 묀헨글라드바흐 소속으로 1번(2012년), 도르트문트 소속으로 1번(2020년) 뽑히며 총 2회 선정되는 영예를 얻었다. 도르트문트 유스 출신으로 묀헨글라드바흐에서 독일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면서 최고조로 주가를 올렸을 당시에도 바이에른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친정팀을 선택했다. 이런 점도 그가 비바이에른 선수 베스트 일레븐에 이름을 올릴 만한 플러스 요소로 작용한다.


CF 우베 젤러(함부르크)

게르트 뮐러 등장 이전 독일 최고의 공격수. 현재까지도 독일 축구사를 통틀어 뮐러에 이어 역대 2위의 공격수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함부르크 유스 출신으로 1953년 프로 데뷔해 1972년까지 무려 19시즌 동안 함부르크 한 팀에서만 활약했다. 게다가 독일 올해의 선수에만 무려 3차례(1960, 1964, 1970) 오르면서 프란츠 베켄바워(4회)에 이어 역대 2번째로 많은 수상을 자랑하고 있고, 각종 대회에서 무려 11번의 득점왕을 달성했다. 분데스리가 초대 득점왕(1963/64 시즌 30골)의 주인공 역시 젤러이다. 하지만 그의 선수 경력 중 절반 이상이 분데스리가 이전 시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게 아쉬운 부분. 이로 인해 그가 분데스리가를 소화한 시즌은 9시즌이 전부이다(그마저도 선수 경력 말년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그는 분데스리가만 국한 짓더라도 137골로 구단 역대 최다 득점자이자 분데스리가 역대 최다 골 19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함부르크의 신앙이자 유일신이자 신성 불가침의 영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한 명의 선수가 구단 역사에 있어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건 독일에선 젤러가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비고: 만프레드 칼츠(함부르크 포함 3개 구단)

이래저래 칼츠가 빠진 건 아쉬운 일이다. 칼츠는 분데스리가만 놓고 보면 역대급 선수라고 봐도 무방하다. 분데스리가 기준 함부르크 한 구단에서만 무려 18시즌을 뛰면서 581경기 출전으로 역대 최다 출전 2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고,  '바나나 크로스(Bananenflanken)'라는 단어를 창조했을 정도로 환상적으로 감아돌아가는 킥을 바탕으로 수비수 포지션에서 뛰었음에도 많은 골(76골)을 양산해냈다(수비수 기준으로 따지면 두이스부르크의 전설적인 수비수 베르나르드 디츠와 함께 분데스리가 역대 최다 골). 그가 뛰는 동안 함부르크는 분데스리가 우승 3회(1978/79, 1981/82, 1982/83)와 DFB 포칼 2회(1975/76, 1986/87)에 더해 챔피언스 리그 전신인 유러피언 컵(1982/83)과 유로파 리그 전신인 컵 위너스 컵(1976/77) 우승을 차지하면서 황금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그의 포지션 상대는 다름 아닌 유럽 역대 최고의 오른쪽 측면 수비수 중 한 명인 포그츠였다. 


주석: 1972/73 시즌 포칼 결승전

당시 네처는 묀헨글라드바흐 감독 헤네스 바이스바일러와 마찰도 있었던 데다가 레알 마드리드 이적이 일찌감치 성사된 시점이었다. 게다가 부상을 당한 상태였기에 포칼 결승전에 출전이 불투명했다. 결승전 상대는 공교롭게도 네처와 함께 독일 대표팀에서 플레이메이커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 중이었던 오베라트의 쾰른이었다. 전반전이 1-1로 끝나자 바이스바일러 감독은 네처에게 교체를 지시했으나 그는 많은 카메라들이 집중되어있는 와중에도 몸상태를 이유로 교체 출전을 거부했다. 결국 승부는 연장전으로 접어들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네처는 "그럼 이제 뛰겠다"라면서 그라운드에 나섰고, 교체 출전한 지 단 4분 만에 골을 넣으며 2-1 승리를 견인했다. 이와 함께 묀헨글라드바흐에게 귀중한 포칼 우승을 선사하고 그는 레알 마드리드로 떠났다. 네처의 결승골은 1973년 독일 올해의 골에 당당히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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