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메이라스최호영

KFA 우수선수 해외유학 프로그램의 기억 [최호영의 축구행정]

[골닷컴] 대한민국 최고의 축구 스타 손흥민이 신종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리그 휴식기를 이용해 기초 군사훈련을 마쳤다. 축구 팬들은 리그가 하루 빨리 재개되어 손흥민이 다시 활약하길 기대하고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손흥민을 마지막으로 종료된 대한축구협회의 우수선수 해외유학 실무 경험의 기억을 공유하려고 한다.

대한민국은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유럽의 벽을 넘지 못하고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다. 대표팀을 이끌던 차범근 감독은 대회 도중 경질되며 축구계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2002 한일 월드컵 개최가 확정되었고 축구에 대한 국민적 기대감이 커질 시기라, 민첩하게 위기를 극복하고 국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그리하여 정몽준 회장은 이용수 세종대학교 교수를 기술위원장에 선임하는 파격을 시도한다. 협회 기획실장 출신 이용수 기술위원장은 2002 월드컵에서는 예선부터 유럽 팀과 붙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국내 유망주를 유럽에 보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청소년 대표팀의 주축이었던 이동국, 설기현을 유럽에 보낼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동국은 소속 에이전시에서 자체적으로 팀을 찾아 유럽에 진출했다. 그 팀이 바로 현재 19세 이하 대표팀 일원 박규현이 몸 담고 있는 독일의 베르더 브레멘이었다. 이동국은 브레멘에서 임대로 7경기를 뛰고 무릎 부상을 당해 포항 복귀를 선택했다.

기사는 아래에 이어집니다

반면, 광운대학교 3학년이었던 설기현은 대한축구협회가 직접 기획한 프로그램으로 유럽 구단을 물색해 주었다. 당시 협회는 2002 월드컵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자체 규모와 인력이 부족해 국제 업무에 능한 현대중공업에서 많은 직원이 파견 나와 있었다. 그리하여 현대중공업 유럽 법인에서 설기현을 영입할 수 있는 프로 구단을 찾았고, 그 팀이 바로 벨기에의 로얄 엔트워프였다.

설기현 앤트워프이상락

엔트워프의 구단주가 테니스를 아주 잘 치는 분이었는데, 당시 이 프로그램을 담당했던 기획실의 이상락 부장(현 현대중공업)도 아마추어 이상의 테니스 실력자여서, 테니스로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설기현의 첫 유럽 프로 직행을 문제없이 이루어 냈다고 한다. 설기현은 로얄 엔트워프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고, 이후 안더레흐트로 이적한다. 대한축구협회는 이 프로그램으로 설기현 1명을 유럽에 보내는데 성공했지만, 그는 2002 한일 월드컵 16강전 이탈리아 전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터트리며 기대에 부응했다.

대한축구협회의 우수선수 해외유학 프로그램은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그 규모가 확대되어 매년 유망주를 선발해 유럽 구단에서 리그를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정식으로 프랑스 1부 리그 FC 메츠와 협약을 맺어 5명을 보냈고, 이후 매년 3명씩 메츠로 보냈다. 2006년부터는 더욱 확대해 2개 국가에 각 3명씩 보내게 되었고, 프랑스 외에도 브라질, 포르투갈, 잉글랜드, 마지막 해에는 독일의 프로 구단과 교류를 하게 되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기획 의도와는 다르게 최적의 자원을 보내지 못할 경우도 있었다. 당장 국제대회의 성적을 위해, 정작 유럽에서 성장 가능성이 높은 선수들을 선발하지 못하고 차순위 선수들로 구성하는 경우도 생겼다. 또한 국내 프로 구단 입장에서는 우수한 자원을 스카우트하고 유럽 구단에 그냥 보내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K리그 유스 팀 선수들이 선발되지 않기도 했다. 또한 유럽 구단에서 유학 후 정식 영입을 제의했으나, 국내 팀의 설득으로 복귀 하는 사례도 많았다.

그 중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선수가 두 명 있다. 4기 브라질 팔메이라스로 유학을 갔던 3명의 선수 중에 센터백과 라이트백을 봤던 정현윤(전 전남 드래곤즈, 현 FC안양)이 있다. 팔메이라스에서 재능을 눈 여겨 보고 계약 요청을 했으나, 어떤 연유인지 국내에 복귀했고 연령별 대표팀에는 선발되었지만 족적에 남을 만한 프로생활을 하지는 못했다. 만약 브라질에 남았더라면, 어떤 선수가 되었을지 궁금하다. 또 다른 한 선수는 SC브라가로 유학 갔던 한건희이다. 기술적인 재능을 높이 샀던 브라가에서 영입 제의가 있었고 계약을 마무리했지만, 비자 및 기타 문제로 끝내 진출하지 못했다. 이후 방황 끝에 선수 생활을 끝낸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해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의 준우승을 이끈 서울이랜드 정정용 감독이 협회 전임지도자로 포르투갈에 동행해 선수들을 관리하고 한건희의 계약까지 이끌어낸 바 있다.

이 외에도 매년 최소 1명의 선수들이 정식 계약 제의를 받았으나, 유럽에서의 적응과 국내 소속 학교 및 구단에서의 강력한 요청으로 대부분 복귀하게 되었다. 최종 선택과 결정은 개인의 몫이었지만, 최소 계약 제의까지 받았는데 국내에 복귀한 사례는 많은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팔메이라스최호영

우수선수 해외유학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책임 실무자였던 당시 손성삼 대한축구협회 과장은 협회의 자체 스카우팅 문제점도 발견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더 세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지역도 다양화하며 국내 유소년 선수들에게 가장 적합한 지역이 어딘지 항상 고민하며 프로그램의 질을 향상시켰다.

수 년에 걸쳐 진행하던 프로그램에 직접 실무자로 참여하면서 전율을 느꼈던 에피소드를 공유하고자 한다. 2007년 이야기다. 현재 경남FC를 이끄는 설기현 감독의 레딩 시절 동료였던 잉글랜드 국가대표 출신 니키 쇼레이의 아버지 스티브 쇼레이가 당시 레딩의 스카우트 총 책임자였는데 이 프로그램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스티브 쇼레이는 웨스트햄에서 리오 퍼디난드 등을 발굴한 유명한 유스 스카우터였다. 당시 필자가 인천국제공항으로 픽업을 나갔는데, 그가 만나자 마자 하는 말이 “한국 축구가 아시아 리더인 이유를 알겠다. 한국인들은 동남아인들에 비해 체격이 크다. 특히 여성들의 키가 크다. 그래서 유스 선수들의 피지컬이 좋은 것 같다”였다. 특유의 피지컬 경쟁력이 아시아 축구를 호령한다는 뜻이었다. 스티브 쇼레이의 방문으로 스카우팅에 대한 다양한 이론과 경험을 습득할 수 있었다. 1차로 스티브 쇼레이 이후, 2차로 볼튼 원더러스의 유스 디렉터 피터 알몬드도 방한해 국내 선수들을 직접 선발해 가기도 했다.

당시 협회는 17세 이하 A와 B팀을 구성해 파주에서 자체 선발전을 진행했고, 스카우트 디렉터가 와서 선발하는 시스템이었다. 1차 선발에서 남태희가 1번, 김원식이 2번, 지동원이 3번을 받았다. 쇼레이 디렉터는 3번으로 지동원과 백성동을 놓고 고심하다 결국 지동원을 선발해 갔다. 당시 17세 대표팀에서 중앙 미드필더를 봤던 백성동은 기술과 센스로 쇼레이의 감탄을 이끌어냈다. 단 키가 좀 작았는데 쇼레이는 백성동의 피지컬이 유럽에서 원하는 축구를 하기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따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프로 선수는 될 수 있을 거라 자신했고, 실제로 그는 일본과 한국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지동원에 대해서는, 많이 마른 체형의 선수였지만 선발한 이유가 기본적인 스피드와 센스라고 했다. 당시에는 피지컬 성장이 완성되지 않아 더 그렇게 보였지만 성인으로 거듭나며 제대로 된 트레이닝을 받으면 몸이 좋아지고 유럽에서 활동할 수 있는 프로 선수가 될 것이라 말했다. 이어 “미래 레딩에서 프로로 뛸 수 있는 선수를 선발하러 왔다. 레딩 구단의 기준에 맞는 선수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특히 남태희에 대해선 확신했던 기억이 있다. 남태희는 항상 쇼레이의 톱 플레이어로 손꼽혔다. 이렇게 레딩은 공들여 선발한 선수들을 데려가 잘 성장시켰고, 이 선수들은 훗날 프로 선수가 되었다.

*필자는 인디애나 대학교 켈리 비즈니스 스쿨 경영학부에서 재무학을 전공, 리버풀 축구산업 대학원을 졸업하였고, 2006년부터 7년 간 대한축구협회 기획실, 발전기획팀, 기술교육국에서 근무하였다. 부산아이파크 홍보마케팅 실장도 역임한 바 있다.

#본 외부 필진 칼럼은 골닷컴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사진 = 최호영 제공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