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AL 특별기획] (1) ‘25주년’ EPL은 왜, 어떻게 독립 출범했는가

[골닷컴 이성모 기자] 전세계 210개국에서 시청하는 세계 최고의 축구 콘텐츠 잉글리쉬 프리미어리그가 이번 시즌을 기점으로 출범 25주년을 맞이했다. 세계인의 축구 네트워크 골닷컴이 ‘GOAL 특별기획’ 연재를 통해 현재의 EPL을 더 풍부하게 즐기는데 도움이 될만한 지난 25년 EPL의 중요한 흐름과 사건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현재는 과거의 산물이다. 이유 없이 벌어지는 현상은 없다. 그러므로, 과거를 이해하는 것은 곧 현재를 더 잘 알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전세계 210개국에서 시청하고 약 7조 원의 매출을 올리는 세계 최고의 스포츠 컨텐츠가 된 EPL(딜로이트 발표자료, 2015/16시즌 기준)이 현재와 같은 인기와 지위를 얻게 된 데에도 분명히 그 이유가 존재한다. 그 정확한 이유와 ‘뿌리’를 알고 나면, 프리미어리그의 현재 모습을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EPL 25주년을 맞이해 기획한 [GOAL 특별기획] 1편에서는 1992년, 프리미어리그가 100년 이상 이어진 잉글랜드 풋볼리그로부터 독립해서 새롭게 출범한 시대적 배경과 결정적인 계기, 그리고 그 사이에 있었던 패러다임의 전환과 그것이 오늘의 EPL에 미친 영향에 대해 조명해본다. 

1. 잉글랜드 축구계의 위기의식, 프리미어리그 독립 출범의 시대적 배경 

1992년, EPL의 독립 출범에는 크게 두 가지의 배경이 있었다. 

잉글랜드 축구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시대적인 배경, 그리고 좀 더 직접적으로 ‘돈’ 혹은 TV 중계권 계약에 관한 결정적인 배경 두가지가 그것이다. 그 두 가지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시대적 배경에 대해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1888년 세계 최초의 축구 리그인 ‘풋볼리그’ 출범 이후 잉글랜드의 축구 역사를 거시적으로 돌아보면, 아마도 잉글랜드 축구계의 최전성기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는 1960년대와 1970년대였을 것이다. 국가간 축구 경쟁력의 가장 객관적 척도라고 볼 수 있는 국가대항전(월드컵 등)과 클럽들의 유럽 대항전(유러피언컵 등)의 기록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잉글랜드가 현재까지 유일하게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것이 1966년이었다는 점, 그에 더해서 잉글랜드 클럽이 유로피언컵(챔피언스리그의 전신)에서 6년 연속 우승을 포함해 각종 대회에서 가장 압도적인 모습을 보인 시기가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라는 점이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이 기간 중 유로피언컵 우승 팀 : 리버풀 3회, 노팅엄 포레트스 2회, 아스톤 빌라 1회)  

그러나, 영원히 이어지는 ‘전성기’는 없다. 잉글랜드 축구계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60년대, 70년대의 영광을 이어가지 못하고 점점 더 많은 문제들에 봉착하게 되는데가장 심각한 것이 통제불가능한 수준으로 극화된 훌리건 문화, 그리고 헤이젤과 힐스브로 등의 경기장에서 발생한 안전사고 등이었다. 

이 두가지의 사건 중 특히 유벤투스 대 리버풀의 유러피언컵 결승전 시작 전에 나온 ‘헤이젤 참사’는 이후 잉글랜드 클럽들이 5년 간 유럽 대항전에 출전할 수 조차 없는 징계로 이어졌고 이는 잉글랜드 축구계에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타격이 됐다. 이미 유러피언컵이 최고의 유럽 대항전으로 자리잡은 유럽에서, 그 대회에 출전조차 할 수 없는 팀으로 이적할 스타 선수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스타 선수의 이탈 및 감소는 곧 그 리그의 경쟁성과 인기의 감소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헤이젤 참사가 발생한 후 4년 후인 1989년에 발생한 힐스브로 참사는 잉글랜드 축구계를 넘어 사회전반적으로 심각한 안전에 대한 심각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해 1년 후인 1990년 힐스브로 참사에 대한 ‘테일러 리포트’가 나오면서 이후 잉글랜드에서는 모든 경기장을 좌석제(그 전에 그랬던대로 일어서서 응원하는 것이 아닌 자리에 앉아서 응원하도록)로 변경하게 된다. 

1992년에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하게 된 시대적 배경에는 이 모든 것들이 영향을 미쳤다. 1960, 70년대(혹은 1980년대 초반까지) 잉글랜드가 누렸던 영광이 서서히 무너지는 시점에 터진 헤이젤 참사, 힐스브로 참사 등의 사고로 잉글랜드 축구계에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점점 고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기의식은 곧 또 다른 변화와 개혁을 불러오게 된다. 그 촉매제이자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은 ‘돈’, 좀 더 구체적으로는 ‘TV 중계권’ 계약이었다. 

2. 돈, TV 그리고 축구의 ‘상품화’ - 프리미어리그 독립출범의 결정적 배경  

맨유의 경기를 시청하는 팬들이 수백만 명이지만 맨유가 벌어들이는 중계권 수익은 ‘0원’이다.
 
아스널의 경기를 시청하는 팬들로부터 나오는 중계권 수익을 ‘4부 리그’의 스윈든이 함께 벌어들인다. 

2017년의 축구팬들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늘날 우리는 프리미어리그 클럽들의 가장 큰 수익원 중 하나가 중계권 수입이라는 점과, 프리미어리그가 20위 팀도 1위 팀을 이길 수 있는 가장 치열한 리그로 발전한 이유가 곧 중계권 수입의 균등배분제(50-25-25제도)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위에 설명한 상황은 1980년대 잉글랜드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상황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프리미어리그의 출범은 그런 상황에 대한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됐다. 

왜 맨유의 경기를 보기 위해서 TV를 보는 시청자들이 무수히 많은데 맨유가 단 한 푼도 중계권 수익을 올릴 수 없는지, 혹은 왜 아스널이 그들의 경기를 보기 위해 TV를 시청하는 팬들로부터 나오는 수익을 3, 4부 리그 클럽들과 공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불만이 곧 그들로 하여금 기존의 1~4부 리그를 하나로 묶었던 ‘풋볼리그’에서 탈피해 그들만의 새로운 리그를 만들고 싶다는 야망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변화를 촉발한 것은 구단들이 아니라 잉글랜드의 방송사들이었다. 구단들이 먼저 그 문제를 제기하고 방송에 대한 고민을 한 것이 아니라, ‘축구가 곧 돈이다’라는 사실을 간파한 잉글랜드의 방송사들이 구단에 먼저 독점 중계권에 대한 제안을 하고 나선 것이 그 결정적인 계기였던 것이다.

당시의 움직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이를테면 프리미어리그 탄생의 ‘주인공’ 격의 역할을 했던) 인물 중에는 아스널 부회장이자 이후에 아르센 벵거 감독을 아스널로 데려오는 데이비드 딘, 그리고 1980년대 중반 런던 위캔드 텔레비전(LWT)의 회장이었고 이후에 축구협회 회장이 되는 그렉 다이크라는 인물이 있었다. 아래 내용은 데이비드 딘이 프리미어리그 출범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는 한 강연에서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묘사한 당시 상황이다. 

“1980년대 초, 잉글랜드 축구 클럽들과 TV 방송사는 아주 특이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당시 구단들이 TV 방송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이 얼마였는지 아는가? ‘0’이었다. 

그러던 1986년, 런던 위캔드 텔레비전을 운영하던 그렉 다이크라는 남자가 나에게 비밀리에 다른 네 클럽의 핵심인물을 모아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우리는 ‘빅 5’라고 불렸는데, 그 ‘빅 5’는 아스널, 토트넘, 맨유, 리버풀, 에버튼이었다. 결국 그 5클럽의 대표들이 다이크와 함께 런던 위캔드 텔레비전의 한 사무실에서 비밀리에 회의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그는 우리에게 ‘자네들은 지금 자네들의 상품(축구를 의미)을 통해 아무런 수익도 못 올리는 걸 알고 있나? 자네들의 상품은 곧 TV 수익을 올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나는 자네들 5클럽 각자에게 100만 파운드씩을 지불할 의향이 있네. 그 대신 나는 5클럽의 방송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를 원하네’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 때까지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결국 그렉 다이크가 처음 제안했던 ‘빅5’ 클럽에 대한 독점적 중계권에 대한 아이디어가 당시 시대적으로 변화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고 있던 클럽들, 그리고 잉글랜드 리그 전체로 하여금 변화를 향하게 나가는 촉매제가 됐다. 이후 1980년대 후반 잉글랜드에서 유료중계권 계약이 발생하지만, ‘빅5’를 포함한 점점 더 많은 1부 리그 클럽들은 그들 경기의 시청자들로부터 창출되는 수익이 2, 3, 4부 리그 팀들과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과반 이상의 1부 리그 클럽들이 새로운 독립 리그 출범에 찬성하면서 1992년부터 새로운 리그가 출범한다는 사실이 확정됐다. 그들이 처음 고려했던 새 리그의 이름 중에는 ‘프리미어리그가’ 아닌 ‘슈퍼 리그’라는 이름도 존재했다. 

그렇게 100년 이상 이어져온 풋볼리그에서 탈피해서 새로 출범하게 된 프리미어리그는 원년인 1992년부터 뜻밖의 ‘대형’ 중계권 수익을 올리게 됐다. 그 일의 수혜자는 프리미어리그의 모든 클럽들이었고 피해자는 그 아이디어를 최초에 제안했던 남자인 그렉 다이크였다. 그와 같은 생각을 품었으나 돈은 더 많았던 경쟁자가 새로 출범하는 리그의 중계권을 독점적으로 구매하기 위해 모두의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을 제시(5시즌에 약 3억 파운드)했던 것이다. 그 남자의 이름은 ‘언론 재벌’로 유명한 루퍼트 머독, 그가 이끌었던 회사는 BSkyB, 현재의 스카이스포츠다.

GOAL 특별기획

(최초의 프리미어리그 중계권을 구매한 현재의 스카이스포츠를 이끌었던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 프리미어리그의 그 태생부터 이미 TV 중계권계약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 무료에서 유료로, 방송 패러다임의 변화와 프리미어리그의 발전

결국 그런 과정을 통해 1992년,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했다. 영국 언론에서는 지금도 프리미어리그의 출범을 ‘빅뱅’이라고 표현한다. 그 일로 인해 초래된 변화가 얼마나 컸는지를 잘 반영하는 표현이다. 

아마도 그 후로 이어진 모든 변화들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무료에서 유료로 완전히 달라진 방송 패러다임의 변화와 그에 따른 생산, 소비 행태의 진화일 것이다. 1992년을 기점으로 잉글랜드의 축구팬들은 축구를 무료로(지상파를 통해) 볼 수 있던 상황에서 유료로 돈을 지불하고 ‘위성접시’를 설치해야만 축구 생방송을 볼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게 됐다. 

그 변화는 2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유효해서, 현재도 잉글랜드에서 TV를 통해 축구 생방송을 보기 위해서는 대략 월 30파운드(약 4만 5천 원)이상의 비용을 내거나 한 경기당 7파운드 내외의 비용(약 1만 원)을 내야 합법적으로 시청할 수가 있다. 그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에 정작 프리미어리그의 본토인 잉글랜드에서 TV로 축구를 보지 못하고 가까운 펍을 찾는 등 다른 방법을 찾는 팬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아래 소개하는 내용은 잉글랜드인이고 그 변화를 잉글랜드에서 직접 겪었던 현재 골닷컴 UK 편집장인 마크 버킹엄의 당시 상황에 대한 소회다. 

“1980년대, 1990년대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하기 전에 잉글랜드에서는 지상파를 통해 무료로 축구 생방송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한 이후로는 스카이스포츠에 가입하고 위성접시를 설치해야만 생방송을 볼 수 있었다. 그 첫 시즌에는 우리 집이 스카이스포츠에 가입을 하지 않아서 가입한 이웃집에 가서 프리미어리그 생방송을 함께 보기도 했던 것이 생각난다.” 

몇십년을 무료로 즐기던 것이 유료로 바뀐 것에 대한 우려와 저항의 목소리가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결과 프리미어리그 클럽들은 방송을 통해 점점 더 많은 수익을 올리게 됐고, 클럽과 리그 전체에 ‘돈’이 늘어나자 외국의 스타 선수들이 프리미어리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 칸토나(맨유), 베르캄프(아스널), 졸라(첼시) 등 스타 선수들과 벵거, 훌리에, 굴리트(선수 겸 감독) 등을 시작으로 외국인 감독의 시대가 열린 것 역시 방송 중계권과 결코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4. 방송의 세계화와 ‘50/25/25모델’, 프리미어리그 25년의 결과

결국 그렇게 프리미어리그는 시간이 가면서 점점 그들이 최초에 원했던 결과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축구를 ‘상품’으로 인지한 방송사와 그들 자신의 세계화에 대한 의지에 의해 25년이 지난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는 축구 리그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처음부터 50/25/25모델(리그 전체 중계권을 50은 공동분배, 25는 순위에 따라 25는 방송횟수 등에 따라 차등지급하는)을 정립한 결과 리그 1위부터 20위까지의 격차가 다른 리그에 비교해서 가장 적은, 그래서 가장 예측이 불가능하고 흥미진진한 리그를 디자인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1992년 당시 3억 파운드 수준이었던 프리미어리그 중계권료는 2015년에 50억 파운드로 약 17배 증가했다. 2015년 기준으로 중계권료 수입으로만 7조 원의 넘는 수익을 올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수익은 고스란히 리그, 각 구단들에게 돌아가 오늘날에는 프리미어리그의 중하위권 팀들도 유럽 주요 국가대표팀의 핵심 선수를 영입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1992년 프리미어리그의 출범과정을 우리가 다시 돌아보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인사이트는 프리미어리그는 ‘어느날 갑자기 우연히’ TV 중계권 수입으로 인해 막대한 부를 누리고, 그로 인해 스타선수들이 몰려드는 가장 인기 있는 리그가 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시작부터 TV 중계권에 대한 고민을 누구보다 빠르게 시작해서 그로 인해 오늘의 결과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오늘날 프리미어리그가 누리고 있는 ‘특수’는 처음부터 철저한 계획에 따라 추진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 과정(과거)과 그로 인한 결과(현재)를 이해하고 나면 미래에 대해서도 예측할 수 있다. 

프리미어리그는 한국 팬들이 소위 말하는 ‘레바뮌’(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 세 팀을 유럽 최고의 엘리트 클럽으로 보는 시각은 잉글랜드 및 유럽에도 존재한다) 없이도 25년에 걸쳐 가장 인기 있는 리그를 만들어냈다. 다만, 앞으로 프리미어리그에 그 세 팀과 대적할 수 있는 클럽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점은 현재로서 추측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한가지 논리적이고 또 합리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TV 중계권에 대한 아주 큰 기술적, 혁신적인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한 1992년 그 이전부터 철저히 기획되고 25년 동안 이어져왔던 프리미어리그의 ‘가장 인기 있는 리그’라는 타이틀은 앞으로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글=골닷컴 이성모 기자 

그래픽=골닷컴 박성재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