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닷컴] 서호정 기자 = 19일 저녁 2017 KEB하나은행 FA컵 4라운드(32강전)가 열린 서울월드컵경기장의 남측 관중석이 붉은 불빛과 연기에 휩싸였다. 원정팀 FC안양의 서포터즈인 A.S.U RED의 홍염 퍼포먼스였다.
엄청난 수의 홍염이 만든 엄청난 불빛에 누군가는 감탄사를 보냈고, 누군가는 비난의 목소리를 냈다. 전자는 유럽에서나 볼 법한 퍼포먼스로 인한 장관에 먼저 눈이 가는 입장이었다. 후자는 경기장 내 홍염 사용은 불법이라는 원칙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논란의 대상이 됐지만 퍼포먼스를 주도한 안양 팬들의 가슴에 담긴 응어리와 울분은 다수가 이해한다는 반응이었다.
FC서울과 FC안양의 역사적인 첫 대결에 대한 배경 설명은 이제 익숙하다. 그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퍼포먼스의 의도와 목적, 그리고 그것을 준비하기 위한 자금 마련부터 쉽지 않아 보였다. 유재윤씨가 지난 3주 간의 준비 과정과 사연을 공개했다.
이날 사용된 홍염은 무려 103개였다. 안양 서포터즈인 A.S.U RED의 대표 유재윤씨는 “100개를 마련했는데 불발이 나올까봐 3개를 더 준비해갔다. 모두 정상적으로 터졌고 나머지 3개도 그냥 터트렸다”며 추정만 되던 홍염의 개수를 밝혔다. 홍염 금액만 수백만원이 들었다. 그 돈은 서포터즈가 자발적으로 모았지만 의외의 지원도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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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추첨이 끝나자마자 3라운드에서 호남대를 이기면 저들(서울)과 붙는 걸 알고 있었다. 호남대를 이길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상암으로 가는 것이 확정되고 갑자기 우리 서포터즈 계좌에 후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떤 얘기가 하지 않았는데 10만원, 20만원의 돈이 평소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으로 입금됐다. 그 뒤에는 다른 팀 팬들의 입금도 이어졌다. ‘인천 팬인데 꼭 이겨라’, ‘대전 팬인데 정의구현해라’, 수원팬들도 익명으로 십시일반해서 보내왔다. 가장 인상적인 분은 우리 개막전 때 친구와 함께 경기장에 왔다가 경품 차량을 받았다면서 그걸 되팔아서 후원해주겠다고 했다. 마음이 같은 이들이 많구나라고 느꼈다. 그런 지원이 힘이 돼 퍼포먼스를 준비할 수 있었다.”
홍염 퍼포먼스를 보는 시각에 담긴 불안감과 우려는 또 있었다. 보통 그 다음은 감정에 치우친 우발적인 행동으로 인해 폭력이나 그라운드 난입 등의 추가 사태가 벌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런 사태는 없었다. 퍼포먼스를 옹호할 순 없지만 경기 시작 전 홍염을 터트린 것으로 안양의 선을 넘은 행동은 끝났다.
유재윤씨는 “서포터즈 커뮤니티를 통해 경기 사흘 전에 행동 지침을 공지했다. 퍼포먼스 외의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고 개인의 안전이 달린 문제임으로 감정적으로 화가 나도 절대 자제하라고 요청했다”라며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폭력을 누가 좋게 보겠는가? 대신 그 분노의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 우리 선수들의 응원에 집중시키자고 했다. 그러면 선수들도 한 걸음 더 뛴다고 믿었다”라며 경기 내내 일사분란했던 응원전이 가능했던 이유를 소개했다.
kfa13년을 기다린 안양 팬들은 뜨겁게 열정을 태웠다. 그라운드 위의 안양 선수들도 있는 힘을 다 짜내며 인상적인 경기를 펼쳤다. 그러나 서울의 경기력이 한 수 위였다. 차분하게 경기를 풀어간 홈팀은 전반에만 2골을 넣은 윤일록의 활약을 앞세워 2-0으로 안양을 눌렀다. 유재윤씨는 “그들이 강팀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축구는 스코어가 전부는 아니다. 그들을 이겼어도 우리의 울분과 분노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번 과정에서 우리 팬들, 선수 모두 성장했고 얻은 것이 분명히 있다”라며 의미를 소개했다.
임은주 안양 단장도 선수들과 팬들이 한 마음으로 뭉쳐 만든 열정의 의미를 강조했다. “선수들이 120%를 해냈다. 경기력이 좋았다. 안양 입장에서는 한맺힌 경기였다. 홍염은 서포터즈의 열정으로 본다. 양팀 간에는 오랜 히스토리가 있고 이번 경기가 많은 관심을 받았다”라며 단지 FA컵 32강전 한 경기 이상의 의미라고 해석했다.
적장인 서울의 황선홍 감독도 “역시 축구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양팀의 역사가 좋은 내용으로 승화가 됐으면 한다”라고 말해 팀을 떠나 축구계 전체의 의미를 담은 시각을 밝혔다. 안양의 김종필 감독은 “연고이전 당시 안양공고 감독이어서 그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지역의 모든 팬들의 마음을 이해했고 더 강하게 정신 무장을 했던 경기였다”라며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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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서포터즈의 홍염 퍼포먼스는 징계를 피할 수 없다. 대한축구협회는 “대회 규정에 따라 징계위원회에 회부된다. 다음주 중에 위원회가 열릴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같은 장소에서 열린 FA컵 4강전에서 원정팀 부천FC도 홍염 퍼포먼스를 펼쳤다가 벌금 500만원을 받았다. 홈팀인 서울은 소지품 검사 등을 통한 안전 확보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차원에서 경고를 받았다. 당시 징계가 이번 사안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번 사인의 징계 수위가 더 높을 수도 있다는 관측도 존재한다. 홍염 숫자가 부천의 경우보다 훨씬 많았다. 현장에 있었던 감독관의 보고서 내용에 따라 징계가 가중될 수 있다. 축구협회 관계자는 “징계가 약하면 이런 문제가 앞으로 계속 빚어질 수 있다. 여러 부분을 검토해서 징계 내용이 결정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안양 구단은 “징계 부분은 구단이 책임져야 하는 게 맞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퍼포먼스 의미 자체가 팬들의 오랜 응어리가 담겼음을 인지하기 때문이었다. 안양의 창단 자체가 연고이전으로 팀을 잃은 팬들의 적극적 행동으로 이뤄진 만큼 그 퍼포먼스는 구단의 역사이자 정체성의 발현이었다. “잘했다는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팬들의 심정을 구단이 이해할 수 밖에 없는 퍼포먼스였다. 책임을 피할 생각은 없다”라는 게 안양 구단의 이야기였다.
유재윤씨는 징계 건에 대해 “각오했다. 그리고 우리가 제재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마련하고 있었다. 구단에 피해를 줄 생각은 절대 없다. 금액은 나와야 알겠지만 그 돈을 모두 다 마련해 구단에 전달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과거 성남FC, 광주FC 등은 징계에 대한 팬들의 모금을 받지 않았다. 구단이 마치 규정 위반을 조장했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안양 역시 비슷한 입장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그에 대해 유재윤씨는 “구단에서 모금액을 받지 않겠다고 하면 그 돈으로 시즌권을 사든, 뭘 하든 구단에 도움이 되는 결정을 하겠다”라며 안양 서포터즈의 입장을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