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범Russian Premier Liga

황인범, 어떻게 도깨비 팀 루빈 카잔의 '신형 엔진' 됐나

[골닷컴] 한만성 기자 =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는 매 시즌 시작이 대다수 주요 유럽 리그보다 빠르다. 겨울 혹한기가 유독 긴 러시아다. 매 시즌 늦어도 7월에는 리그를 시작해야 충분한 겨울 휴식기를 확보할 수 있다.

황인범(24)의 소속팀 루빈 카잔은 개막전부터 우승후보를 꺾었다. 루빈 카잔은 25일(한국시각) 홈구장 아크바스 아레나에서 지난 시즌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준우승팀이자 올 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 리그 무대를 밟는 스파르타크 모스크바를 1-0으로 격침했다. 선발 출전한 황인범은 스파르타크 모스크바를 상대로 90분 풀타임을 소화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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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드 슬러츠키 루빈 카잔 감독은 경기가 끝난 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황인범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질문의 요점이 황인범에게는 썩 달갑지 않을 만한 내용이었다. 슬러츠키 감독에게 질문한 취재원은 "지난 시즌 후반기, 그리고 오늘 올 시즌 개막전에서 황인범이 보여준 퍼포먼스를 어떻게 평가하나? 외부에서 볼 때, 그는 지난 시즌 전반기와 비교하면 경기력이 눈에 띄지는 않은 것 같다"며 비판적 시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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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슬러츠키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그는 해당 취재원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지난 시즌 중반부터 황인범의 경기력이 저하됐다는 지적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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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의적 플레이메이커에서 살림꾼으로, 이적 초기와 비교하면 역할이 다르다

황인범은 객관적인 전력에서 루빈 카잔보다 한 수 위로 평가받는 스파르타크 모스크바를 상대로 태클 성공 2회, 가로채기 3회를 기록했다. 그가 한 경기에서 태클 성공, 가로채기 횟수를 합쳐 상대로부터 공을 5회나 빼앗은 건 유럽 진출 후 두 번째로 많은 기록이다. 특히 이는 그가 루빈 카잔이 주로 공격적인 경기를 펼치는 홈에서 기록한 가장 많은 단일 경기 볼 탈취 횟수다.

게다가 황인범은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전에서 기록을 통해 수치로 드러나는 태클, 가로채기 외에도 상대 패스의 길목을 가로막으며 몸을 던지는 헌신적인 수비 가담 능력을 선보였다.

황인범, 루빈 카잔 이적 후 단일 경기 최다 태클 + 가로채기 기록
(2021년 7월 27일 현재 기준)

7회 - vs. 아크마트 - 2020/21 원정
5회 - vs. 스파르타크 - 2021/22 홈
5회 - vs. 제니트 - 2020/21 원정
4회 - vs. 아크마트 - 2020/21 홈
3회 - vs. 크라스노다르 - 2020/21 홈
3회 - vs. 탐보프 - 2020/21 원정
3회 - vs. 로토르 - 2020/21 원정
3회 - vs. 디나모 모스크바 - 2020/21 원정

작년 8월 루빈 카잔으로 이적한 황인범이 당시 CSKA 모스크바 원정에서 치른 데뷔전을 시작으로 나선 초반 다섯 경기(컵대회 포함)에서 기록한 개인 성적은 2골 4도움이다. 슬러츠키 감독은 황인범을 영입한 후 그가 팀에 적응하는 기간에는 최대한 자유롭게 움직이며 공격 재능을 선보일 만한 환경을 만들어줬다. 심지어 황인범은 루빈 카잔 이적 후 2개월 활약한 작년 9월 마지막 날을 기준으로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에서 90분당 평균 가장 많은 키패스(득점 기회 창출)를 기록한 선수였다.

작년 9월 30일 기준 2020/21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키패스 순위
(90분당 평균 기준)

4.1회 - 황인범 - 루빈 카잔
3.4회 - 올리비에 틸 - 우파
3.4회 - 오디세 로시 - 아크마트
3.3회 - 주앙지뉴 - 소치
3.3회 - 세르게이 카체프 - 아스날 튤라

그러나 황인범은 작년 10월부터 지난 시즌을 마감한 5월까지 개인 성적이 14경기 2골에 불과했고, 도움은 아예 기록하지 못했다. 결국,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모든 선수를 통틀어 1위에 올랐던 그의 90분당 키패스 기록도 시즌 초반에는 무려 4.1회에서 시즌이 끝난 5월 2.2회로 줄어들었다. 단, 이는 황인범의 경기력이 부진했기 때문이라고 단순히 볼 문제가 아니다.

슬러츠키 감독은 시즌 초반부터 황인범이 빠른 속도로 팀에 적응하자 그에게 공격을 지원하는 '10번 역할'보다는 중원 깊숙한 진영에서 팀 전술의 중심을 잡아주는 '8번 역할'을 주문했다. 어차피 루빈 카잔에는 황인범을 제외해도 올여름 AC 밀란 이적설이 제기된 신예 측면 공격수 크비차 크바라츠켈리아(20), 꾸준한 득점력을 자랑하는 최전방 공격수 조르제 데스포토비치(29), 러시아 대표팀 출신 공격형 미드필더 올레그 샤토프(30) 등이 있다. 여기에 올 시즌에는 어린 나이에 헐 시티, 말라가 등에서 활약하며 유럽 빅리그를 경험한 2선 공격수 세아드 하크샤바노비치(22)까지 합류했다.

# 위치만 골문과 멀어졌을 뿐, 볼 소유 능력 발휘할 기회는 여전히 충분하다 

다음은 지난 25일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전 황인범의 주된 활동 구역을 보여주는 히트맵이다. 스파르타크 모스크바는 과거 첼시를 잉글랜드 정상에 올려놓은 주역 빅토르 모제스, 각각 네덜란드, 스웨덴, 러시아 대표팀 일원으로 최근 EURO 2020 본선에 출전한 공격수 퀸시 프로메스, 조르당 라르손, 알렉산데르 소볼레프가 포진한 공격진을 앞세워 4-2-4 포메이션을 가동하는 매우 공격적인 팀이다. 반대로 루빈 카잔은 선방 능력이 러시아 최정상급으로 평가받는 골키퍼 유리 듀핀 앞에서 조직적인 수비로 상대 공격을 끊고 황인범, 샤토프 등이 역습 공격의 물꼬를 터주면 크바라츠켈리아, 데스포토비치 등이 방점을 찍는다.

황인범 히트맵SofaScore

이처럼 황인범은 미드필드 뒷쪽에서 상대 공격의 흐름을 끊어낸 후 자신이 직접 볼을 몰고 루빈 카잔의 속공을 이끌거나 상대 수비라인 뒷공간으로 패스를 찔러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즉, 그가 루빈 카잔 이적 후 원래 자신의 장기로 꼽힌 창의적인 능력을 잃었다거나 볼 소유를 포기한 채 수비를 하느라 상대를 쫓아다니는 플레이만 하는 선수가 된 건 아니다.

실제로 황인범은 스파르타크전 루빈 카잔의 볼 점유율 42.9% 중 개인 점유율이 5.4%로 팀 내 최고치를 기록했다.

루빈 카잔 선수별 개인 점유율 TOP 5
(2021년 7월 25일,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전)

5.4% - 황인범
5.1% - 올리버 아빌트가르
4.4% - 유리 듀핀
4.2% - 실비예 베기치
4.0% - 올레그 샤토프

황인범은 루빈 카잔으로 이적한 지난 시즌 초반 '골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슬러츠키 감독에 대해 "전술을 설명해줄 때 정말 준비해놓은 게 많다. 전술적 플랜을 한두 개 정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준비한다. 감독님이 지시하시는대로 따라가면 신기하게 우리가 경기를 주도하게 된다. 전술적인 부분을 정말 디테일하게 잘 해준다"고 말했었다.

이처럼 황인범은 제니트, 스파르타크 등 강팀을 만날 때는 자기 진영 깊숙한 곳까지 내려앉아 후진 배치돼 팀 수비진을 두텁게 해주며 역습 기회를 노리는 역할에 집중하지만, 루빈 카잔이 객관적인 전력에서 밀리지 않는 상대를 만났을 때는 적극적으로 전진해 공격 진영에서 팀이 경기를 주도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다음 그림 중 왼쪽은 황인범이 팀 전력에 지나치게 떨어지며 수비를 하는 데만 집중하느라 자신의 공격적인 재능을 발휘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밴쿠버 화이트캡스 시절(2020 시즌), 오른쪽은 그가 지난 시즌(2020/21) 공수 균형이 고르게 잡힌 루빈 카잔에서 선보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히트맵이다.

황인범 히트맵SofaScore

루빈 카잔과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의 올 시즌 개막전을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생중계한 러시아 축구 캐스터 알렉시 야로셰프스키는 이날 경기가 끝날 무렵 수비 진영에서 종횡무진 움직이며 상대 공격을 틀어막는 황인범을 가리키며 "그가 이제는 지쳐보인다. 오늘 그의 활동량(work rate)은 정말 대단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황인범은 과거 한국에서 '유망주' 평가를 받을 때와는 달리, 이제는 공격 진영뿐만이 아니라 경기장 모든 구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선수로 성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현대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 상황인 공수 전환 국면(transition phase)에서 강렬한 임팩트를 남길 만한 선수로 변신을 시도 중이라는 점이 고무적인 대목이다. 끝으로 황인범이 지난 시즌을 마친 후 '골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몇 년간 자신의 스타일 변화에 대해 밝힌 내용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러시아는 내가 프로 선수가 된 후 경험하는 세 번째 리그다. 대전 시절의 나를 기억한다면 아실 거다. 그때부터 아산, 밴쿠버, 지금 카잔, 그리고 그 중간중간 23세 대표팀과 성인 대표팀에서 뛰면서 스타일 자체가 많이 달라졌다. 나 역시도 그걸 느끼고 있다. 감독님이 바뀌고, 리그가 바뀌고, 팀의 게임 모델이 달라지는대로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런 변하는 모습을 통해서 내가 분명히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한테는 아시안게임이 정말 컸다. 김학범 감독님이 활동량, 체력을 워낙 중요하게 여기시니까. 그때는 사실 스스로 '내가 활동량이 이렇게 많은 선수가 될 수도 있구나'라고 처음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와 지금은 또 내 스타일이 달라져 있다. 2021/22 시즌에는 유럽대항전(유로파 컨퍼런스 리그)을 경험하게 되면서 내가 달라져야 할 부분이 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어 너무 감사할 뿐이다. 러시아에 있을 때 한국이 너무 그립지만, 나는 선수로서 꿈이 있으니까 다 이겨내야 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 유럽에서도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고 싶다."

글=한만성
자료 제공=OPTA, SofaSc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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