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닷컴] 19일 월요일 새벽 ‘유러피언 슈퍼리그’ 이슈가 터졌다. 유럽 빅클럽끼리 모여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겠다는 선포였다. 기존 축구계가 발칵 뒤집혀 슈퍼리그를 맹비난한다. 이런 반응에도 빅클럽들이 순순히 물러서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도대체 어디서, 왜 나온 아이디어일까? 하나씩 천천히 알아보자.
# 유러피언 슈퍼리그의 정체
UEFA챔피언스리그에서 빅클럽들이 떨어져 나와 직접 주관하겠다는 대회다. UEFA챔피언스리그와 정면충돌한다. 기본 틀은 20개 팀이다. 슈퍼리그 창립멤버 15개 팀은 출전 자격을 영구히 보장받는다. 나머지 5개 자리는 최근 성적을 기준으로 창립멤버들이 간택할 예정이다. 빅15의, 빅15에 의한, 빅15을 위한 ‘그들만의 리그’를 차려 매출을 극대화하겠다는 청사진이다.
현재 창립 멤버로 확정된 클럽은 총 12개 팀이다. 잉글랜드 6개 팀(아스널, 첼시, 리버풀, 맨시티, 맨유, 토트넘), 스페인 3개 팀(아틀레티코,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이탈리아 3개 팀(인테르, 밀란, 유벤투스)이다. 우승 경력보다 현재 매출 규모에 더 가까운 면면이다. 나머지 3개 클럽은 당초 바이에른 뮌헨, 도르트문트, 파리 생제르맹(PSG)으로 알려졌지만, 분데스리가 두 클럽은 특유의 지배구조 탓에 발을 뺐다. PSG도 확률이 낮다. 카타르 정부로서는 빅클럽들보다 FIFA와 관계가 훨씬 중요하다.
# 갑자기?
슈퍼리그는 20년도 더 된 아이디어다. 1998년 빅클럽 진영과 UEFA가 챔피언스리그 개편을 놓고 다퉜다. 빅클럽이 더 많은 분배금을 요구하면서 휘두른 카드가 바로 슈퍼리그였다. 당시 반란군(?) 12개 클럽은 맨유/리버풀, 바르셀로나/레알, 바이에른/도르트문트, 밀란/인테르/유벤투스, 마르세유, 아약스, 포르투였다. UEFA가 양보하면서 양측은 분배금 증액, 경기일 확대(2차 조별리그 신설), 출전팀 수 확대에 합의했다. 빅클럽 협의체는 PSG와 PSV가 가세해 ‘G-14’이 되었다.
경기일 증가는 선수단 체력 저하, 스쿼드 비대화 및 인건비 과다 지출이란 부작용을 낳았다. 2002월드컵에서 유럽 전통 강호들이 몰락하자 이번에는 UEFA가 반격했다. 2002년 7월 이사회에서 G-14 측을 배제한 채 경기일 축소안을 일방적으로 가결했다. 2차 조별리그를 토너먼트 16강으로 대체해서 경기일이 17일에서 13일로 줄었다. G-14은 즉각 반발했지만 내부 의견 분열로 투쟁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G-14은 몸집 불리기의 필요성을 절감해 2008년 회원 수를 대폭 늘려 유럽클럽연합(ECA; European Club Association)으로 재출범했다.
이번에도 ‘불쑥’이 아니다. 지난해 유럽 축구 시장은 코로나19 팬데믹의 직격탄을 맞았다. 재정 규모가 큰 클럽일수록 피해가 컸다. 위기 상황 속에서 빅클럽 진영은 슈퍼리그를, 잉글랜드 풋볼리그는 ‘프로젝트 빅픽처’를 꺼냈다. 처지는 달라도 코너에 몰려 짜낸 생존 전략이라는 공통점을 띤다. 19일 UEFA챔피언스리그 개편안 발표 직전까지 양자간 협상을 벌이다가 결렬된 결과가 18일 일요일 슈퍼리그 긴급 발표로 나타났다.
# 빅클럽이 선을 넘은 것 같은데?
슈퍼리그는 북한의 핵미사일과 비슷하다. ‘에이 설마’라는 의구심과 ‘그러다 쏘면 다 죽는다’라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벼랑 끝 협상 카드다. 이번에는 선을 확실히 넘었다. 창립 멤버 12개 클럽은 각자 홈페이지에 슈퍼리그 참가 결정을 밝히는 선언문을 게시했고, 빠르면 올해 8월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엄포도 놓았다. 내친김에 슈퍼리그 클럽의 주요 인사들은 내부 분열 소지가 있는 ECA에서도 탈퇴해버렸다. Why so serious? 슈퍼리그가 보기엔 자신들이 다크나이트다.
빅클럽이 잘못했네? 그렇게만 보기 어렵다. 프로스포츠 콘텐츠 시장은 빠르게 바뀌는 중이다. 슈퍼리그가 OTT와 손을 잡는 움직임은 매우 자연스럽다. 타깃 소비자 그룹도 바뀐다. 유럽 축구의 미래 시장은 이제 유럽이 아니라 북미와 아시아다. 두 곳 모두 승강제 개념이 없는 미국식 폐쇄형 리그(closed league)에 익숙하다. 유럽의 젊은 세대조차 슈퍼리그 찬성 비율이 높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당장 한국에도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웨스트햄이나 릴보다 토트넘과 아스널을 보고 싶어 하는 시청자가 많을 것이다.
슈퍼리그는 “새로운 대회 창설에서 클럽 분배금 총액은 100억 유로(13조4268억원) 이상이다”라고 밝혔다. 시장점유율이 압도적인 빅클럽끼리 모이면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고, 궁극적으로 각국 축구 피라미드의 수혜도 커진다는 주장이다. 설득력이 있다. 2018년 기준 UEFA챔피언스리그의 매출은 3조7863억원, 미국 NFL 매출은 17조8400억원이다. 슈퍼리그 클럽들이 보기에 이건 UEFA의 무능력 탓이다. 사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차이 아닌가.
골닷컴# 슈퍼리그 참가 선수의 A매치 출전을 막는다잖아?
지금 당장 싸우면 FIFA와 UEFA가 이긴다. 기존 ‘풋볼 유니버스’의 절대자이기 때문이다. 슈퍼리그 참가 클럽을 기존 질서에서 배제해버릴 방법도 많다. 향후 챔피언스리그 출전 자격을 영구히 박탈한다고 윽박지를 수도 있고, 각국 축구협회와 연계해 월드컵과 유로, 혹은 자국 1부 리그 출전을 막을 수도 있다. 유럽 현지의 여론도 모두 빅클럽 이기주의를 성토하는 분위기다. UEFA가 설계한 게임에서 싸우면 당연히 UEFA가 이긴다.
단, 그건 축구 유니버스 안에서 싸울 때 이야기다. 슈퍼리그 측은 이 문제를 일반 사법의 영역으로 끌고 나가려고 한다. 축구 시장의 각종 규정은 EU가 추구하는 자유무역 가치에 반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FIFA나 UEFA는 지금까지 클럽 진영의 요구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축구 분쟁은 축구 안에서 해결한다’라는 원칙을 관철해 왔다. 지금 슈퍼리그 측은 판을 중립지역으로 옮긴다는 작전이다. 국제스포츠중재위원회가 아니라 EU 법원으로 싸우면 사정이 달라질 수 있다. 1995년 보스만이 그렇게 해서 세상을 바꿨다.
#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UEFA와 슈퍼리그 양자가 다시 손을 잡을 가능성이 아직 존재한다. 북한의 핵미사일처럼 슈퍼리그 실행은 양쪽 모두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슈퍼리그가 본 건을 일반 사법의 영역으로 끌고 가도 송사는 늘 하세월이다. 그때까지 슈퍼리그 클럽들이 FIFA와 UEFA의 각종 제재에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최대한 빨리 슈퍼리그 수입을 가시화한다고 해도 신사업에는 항상 리스크가 존재한다.
UEFA도 빅클럽의 시장가치를 무턱대고 무시하기 어렵다. 챔피언스리그의 핵심 상품은 빅클럽과 슈퍼스타들이다. 북미와 아시아 지역의 거대 시장은 유럽 축구 피라미드의 상생을 고려해줄 필요가 없다. 당장 다음 시즌부터 그들이 챔피언스리그에서 없어지면 TV 중계권 및 스폰서십 권리자들이 현 계약을 파기할 수도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이미 벌어졌던 혼란이다. UEFA도 잘 안다.
빅클럽들이 칼을 뽑았다. 휘두르면 너도 다치고 나도 다친다. 실제로 기존의 ‘풋볼 유니버스’를 벨지는 미지수다. 단, 웬만한 양보로는 만족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분명해 보인다. 변화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주 여행 상품이 출시되는 21세기 비즈니스판이다. 빅클럽이 슈퍼리그 창설을 시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1992년 잉글랜드 빅클럽 집단이기주의가 프리미어리그를 만들지 않았는가. 당장 다음 시즌부터 슈퍼리그가 실행될 가능성도 있지만, 그보다는 UEFA챔피언스리그가 빅클럽들의 입맛에 맞춰 크게 변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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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 홍재민
그래픽 = 골닷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