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닷컴] 유로2016이 끝나고 이탈리아축구협회는 안토니오 콘테 국가대표팀 감독의 후임으로 잔피에로 벤투라(당시 68세)를 선임했다. 재임 기간 동안 벤투라 감독은 16전 9승 4무 3패를 기록했다. 그리고 ‘벤투라’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저주받는 이름이 되었다. 달랑 3패치곤 너무 가혹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벤투라 감독은 이탈리아가 60년 만에 FIFA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을 당시의 수장이었다. 잔인한 표현으로는 60년 만에 처음 이탈리아를 월드컵 본선에도 못 보낸 장본인이다. 2018러시아월드컵 유럽 예선 G조 7차전에서 이탈리아는 스페인에 0-3으로 완패했다. 사흘 뒤 홈에서 열리는 이스라엘전에서 이탈리아 관중은 자기 선수들을 야유했다. 조 2위로 밀린 이탈리아는 플레이오프에서 스웨덴에 합산 0-1로 패해 암흑에 빠졌다. 175번째이자 마지막 A매치를 마친 잔루이지 부폰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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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임을 알 수 있는 모든 일이 벌어졌다. 경기 중 워밍업 지시를 받은 다니엘레 데로시는 “뭔 X소리야? (인시녜를 가리키며) 지금 우리는 이겨야 해!”라고 화를 냈다. 전 대표선수 프란체스코 그라치아니는 “내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도 나는 2차전 벤투라의 포메이션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벤투라 감독과 카를로 타베키오 이탈리아축구협회장이 사임했다. 부폰을 비롯해 안드레아 바르자글리, 다니엘레 데로시는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사실 이탈리아는 2006년 월드컵 우승 이후 두 차례 연속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두 대회의 승점 합계가 5점으로 대한민국보다 1점 많다. 2010년 남아공에서는 파라과이, 뉴질랜드와 비긴 뒤에 슬로바키아에 패했다. 지난 대회 우승 감독 마르셀로 리피가 물러났다. 2014년 브라질에서는 잉글랜드를 꺾은 뒤 코스타리카와 우루과이에 내리 패하는 바람에 또 짐을 쌌다. 이때도 체사레 프란델리 감독(2년 전 유로 준우승)과 잔카를로 아베테 회장이 동반 사임했다. 역사상 최약체였다는 유로2016에서 ‘콘테 뽕’ 덕분에 최악을 면할 수 있었을 뿐이다.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라는 치욕으로부터 6개월 후인 2018년 5월 이탈리아축구협회는 로베르토 만치니를 새 대표팀 감독으로 영입했다. 만치니는 선수와 지도자 이력 면에서 누구나 인정할 만한 카드였다. 현역 시절 삼프도리아와 라치오에서 우승을 기록했다. 유벤투스, 밀란, 인테르나치오날레가 있는 세리에A에서 말이다. 감독으로서도 리그 우승 4회(인테르 3, 맨시티 1), 컵 우승 6회(피오렌티나, 라치오, 인테르 2, 맨시티, 갈라타사라이) 정도면 아주리의 보스가 될 자격은 충분하다. 이탈리아 팬들에겐, 무엇보다도, 3부 우승 한 차례뿐인 68세 감독보다는 훨씬 믿음직해 보였다.
만치니 감독은 데뷔전 승리 이후 5경기에서 3무 2패로 부진했다. 2패는 프랑스(1-3)와 포르투갈(0-1)에 나온 결과였다. 이탈리아 대표팀의 현주소를 까발려주는 ‘팩폭’이라고 해도 좋았다. 여섯 경기 만에 부임 두 번째 승리(1-0 폴란드)를 거두고 만치니 감독은 “새로운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라고 말해 논란을 낳았다. 이탈리아 팬들의 눈에는 여전히 아주리는 월드컵 본선에도 나서지 못할 정도로 시원찮은 팀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라니?
결과적으로 만치니 감독은 2018년 9월 포르투갈전 0-1 패배 이후 지금까지 30경기 연속 무패를 달리고 있다. 유로 예선 10전 전승, 본선 조별리그 3전 전승이다. 유로2020 16강에 올라 있는 현재, 만치니 감독은 이탈리아 축구를 새롭게 바꾼 능력자로 추앙받는다. 물론 새로워질 수밖에 없는 환경적 요인도 있었다. 러시아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가 세대교체를 강제한 덕분에 만치니 감독의 신예 발탁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Getty Images만치니 체제는 총 67명을 기용했고, 35명의 A매치 데뷔자를 배출했다. 로마에서 한 경기도 뛰지 않던 니콜로 자니올로를 선발했던 결정이 상징적이다. 골문은 잔루이지 돈나룸마가 지킨다. 니콜라 바렐라, 산드로 토날리, 페데리코 키에사, 모이스 킨 등은 ‘늙은 여우’들만 잔뜩 있는 것 같은 아주리에 젊은 이미지를 입힌다. 만치니 감독 본인이 17세에 프로 데뷔를 신고했고, 23세에 첫 메이저 대회에 출전했던 선수 출신이라는 과거지사도 젊은 피 활용을 주저하지 않는 배경일 것 같다.
경쟁력 있는 플레이스타일과 팀 분위기 회복도 주효했다. 만치니 감독의 이탈리아는 과거 대표팀의 역습 스타일을 버리고 최신 트렌드를 따른다. 킥오프 순간부터 중원 빌드업에 공을 들이고, 개인 능력에 의한 측면 공략, 앞선 라인의 압박 등을 구사하는 ‘현대적 스타일’을 구사한다. 무엇보다 매캐했던 공기를 환기했다. 유로2020 예선이 진행되면서 레오나르도 보누치는 “이제 아무도 지각하지 않는다. 단순히 대표 선수들의 모임이 아니라 진짜 팀이 되었다. 대표팀 유니폼을 입는 순간, 즐거움과 열정, 단합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전임 체제에서 실종되었던 부분을 만치니 감독, 그리고 삼프도리아 우승 동료들로 채운 코칭스태프가 능숙하게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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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2020 예선 10경기에서 이탈리아는 19명이 36득점(상대 자책 1골 제외)을 기록했다. 경기당 3.7골에 달하는 득점력이었지만, 팀 내 최다 득점은 안드레아 벨로티의 4골에 불과했다. 본선 A조 3경기에서도 이탈리아는 3-0, 3-0, 1-0 승리를 거두는 동안 4명이 6골(상대 자책 1골 제외)로 득점력이 분산되었다.
23일 기준으로 슈팅 시도 2위(60회), 유효슈팅 2위(17회) 등 득점 기회 창출 면에서도 출전국 중 두각을 나타낸다. 걸출한 피니셔의 부재가 아쉽긴 하지만, 현재 이탈리아의 공격력은 유럽 최정상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능구렁이처럼 버티다가 한 방을 꽂아 승리하던 이탈리아 축구의 역사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지 차이다. 유로2020 직행을 확정한 상태에서 치른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이탈리아는 아르메니아를 9-1로 대파했다. 만치니의 이탈리아는 매우 공격적이다.
러시아월드컵 진출 실패의 기억은 만치니 감독이 누른 ‘리부팅 버튼’으로 메모리에서 사라진 것 같다. 유일한 불운이라고 한다면, 16강에서 오스트리아를 넘어 올라간 8강에서 세계 랭킹 1위 벨기에와 만날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예선과 본선 조별리그에서 전승을 기록한 두 팀이 8강에서 만나는 대진이 야속하긴 하다. 하지만, 둘의 맞대결에서 어떤 결과가 나든 상관없다. 이탈리아 축구는 살아났고, 난제를 푼 주인공은 만치니 감독이며, 당장 내년 열릴 카타르월드컵에서 우리가 월드컵 통산 4회 우승국과 재회할 것 같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글, 그림 = 홍재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