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tty Images[골닷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팬들이 화가 났다. 구단주의 퇴진을 요구한다. 5월 2일 기습 시위로 맨유와 리버풀의 프리미어리그 34라운드가 취소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유러피언 슈퍼리그 논란에서 발화한 불길이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맨유의 미국인 구단주는 영원한 빌런인 걸까?# 이게 다 말 때문이다
2002년 경주마 ‘지브롤터 바위(Rock of Gibraltar)’가 그랑프리 7연승 우승이란 금자탑을 세웠다. 축구와 무슨 상관이냐고? 공동 마주 중 한 명이 바로 알렉스 퍼거슨 당시 맨유 감독이었다. 퍼거슨 감독은 아일랜드 경마 제왕 존 매그니어의 아내 수 매그니어와 ‘지브롤터 바위’를 공동 소유해 상금을 절반씩 나눴다. 당시 매그니어는 사업 파트너 J.P. 맥마너스와 함께 맨유의 지분 28.7%를 소유한 유력 주주이기도 했다. 퍼거슨 감독과 매그니어 회장은 감독과 주주로서, 경마 애호가로서 죽이 잘 맞았고, 경주마까지 공동 소유할 만큼 친했던 것이다.
화려한 기록을 남긴 ‘지브롤터 바위’가 현역 은퇴하면서 퍼거슨 감독과 매그니어 회장의 관계가 틀어졌다. 은퇴 후 ‘지브롤터 바위’가 올릴 막대한 교배료 수입이 문제였다. ‘역대급’ 챔피언 종마의 회당 교배료는 수억원에 달한다. 매그니어는 “현역 상금만 나눈다”라고, 퍼거슨 감독은 “뭔 소리? 교배료도 절반”이라고 맞섰다. 퍼거슨 감독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기 클럽의 유력 주주인 매그니어를 상대로 1억1천만 파운드짜리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지브롤터 바위’의 당시 평가액 2억 파운드의 절반인 1억 파운드와 송비 1천만 파운드였다.
화가 난 매그니어는 사설탐정을 고용해 퍼거슨 감독의 뒤를 캤다. 탐정은 맨유의 선수 영입 과정에서 퍼거슨 감독이 아들 제이슨과 유착한 정황을 포착했다.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매그니어 회장은 맨유 이사회에 ‘선수 영입에 관한 질문 99가지’를 제출하고 공식 해명을 요구했다. 최종 목표는 ‘퍼거슨 감독 날리기’였다. 소송 제기 1년 만인 2004년 퍼거슨 감독은 250만 파운드에 합의를 봤다. 정나미가 떨어진 매그니어 회장과 J.P. 맥마너스는 맨유 지분까지 처분해 연을 끊기로 했다. 맨유로서는 이들을 대체할 큰손 투자자를 찾아야 했다. Enter the Glazers.
# 내 돈? 네 돈? 다 같은 돈이야!
2003년 글레이저 일가는 맨유 지분 2.9%를 9백만 파운드에 사들여 영국 축구계에 발을 내디뎠다. 이들은 미국 NFL 탬파베이 부캐니어스 인수 경험을 통해 프로스포츠팀이 좋은 투자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맨유의 지분율을 조금씩 늘린 글레이저 일가는 2005년 5월 매그니어와 맥마너스의 지분 28.7%를 사들여 일약 1대 주주(57%)에 등극했다. 글레이저 패밀리는 거침없었다. 한 달여에 걸쳐 지분율을 98%까지 끌어올려 맨유의 경영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6월 22일 런던증권거래소에서 맨유를 상장 폐지한 데 이어 28일 인수 작업까지 완료했다. 창단 127년 만에 맨유는 미국인 소유가 되는 순간이다.
글레이저 일가의 맨유 인수 총비용은 7억9천만 파운드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자기 돈보다 빌린 돈의 비중이 훨씬 컸다. 1980년대 미국에서 성행하기 시작한 ‘차입매수(Leverage Buyout; LBO)’였다. 이런 거다. A가 B를 인수하려고 한다. A는 B의 자산담보대출로 인수금을 치른다. B의 수입으로 이자비용을 해결하면서 단기간에 B의 가치를 키운 다음에(정리해고 등) 되팔아 빚을 갚고 차익을 챙긴다. 부동산으로 따지면, 매입할 건물을 담보로 돈을 빌려 매입 잔금을 치른다. 임대료로 이자 비용을 해결하면서 버티면 건물값이 올라서 큰 이득을 보는 식이다. (얼마 전까지 이렇게 부동산 투자하는 사람들 꽤 있었다!)
글레이저 일가는 인수 대상인 맨유의 자산과 향후 발생 수입을 담보로 제공할 테니 돈을 빌려달라고 미국 금융권의 문을 두드렸다. 많은 은행은 ‘하이리스크’ 대출 요청을 거절했지만, 뉴욕의 헤지펀드와 J.P.모건이 투자를 결정했다. 이렇게 빌린 돈으로 글레이저 일가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팬층을 보유한 축구 클럽을 NFL팀보다 훨씬 싼 가격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J.P.모건에서 글레이저 일가의 투자 계획에 그린라이트를 켜준 주인공이 바로 에드 우드워드였다. 글레이저 일가는 맨유를 인수하면서 우드워드를 맨유의 ‘금고지기’로 꽂았다.
# 생각보다 영리한 글레이저 가문
맨유 팬들은 크게 반발했다. 70년 넘게 빚 없이 살았던 맨유가 하루아침에 5억8천만 파운드 빚더미 위에 앉았기 때문이다. 2004/05시즌 맨유의 연매출액은 1억5900만 파운드였다. 글레이저 일가가 빌린 돈을 맨유가 대신 갚아야 하는 구조에 팬들은 분노했다. ‘맨유 서포터즈기금(MUST)’이 중심이 되어 홈경기마다 밖에서는 시위를, 안에서는 창단 당시 컬러였던 녹색과 금색으로 된 머플러를 흔들어 글레이저 일가 퇴진 운동을 벌였다. 일부 팬들은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 FC’를 창단해 맨유와 인연을 끊었다.
글레이저 일가는 의외로 영리했다. 팬들이 걱정한 선수단 운영 개입이 일절 없었다. 단기간 내 되판다는 음모론도 실현되지 않았다. 글레이저 일가는 끝까지 퍼거슨 감독과 함께한 덕분에 인수 후 프리미어리그 우승 5회,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결승 진출 총 3회) 등 성공을 이어갔다. 무엇보다 글레이저 일가는 돈 버는 귀신들이었다. 글레이저 일가는 2010년 채권 발행과 2012년 뉴욕증권거래소 상장으로 엄청난 부채 부담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했다. 2013년 맨유의 지주회사 ‘레드풋볼’은 “부채를 3억 파운드까지 줄였다”라고 발표했다. 현재 이 숫자가 다시 4억5550만 파운드까지 늘긴 했지만, 글레이저 일가는 딱히 걱정이 없어 보인다.
글레이저 일가는 경영도 잘했다. 인수 11년째였던 2016년 맨유는 잉글랜드 클럽 최초로 연매출 5억 파운드(7798억원)를 돌파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전인 2019년 맨유는 매출 7억2710만 파운드(1조1340억원)를 기록했다. 인수 시점 대비 357% 성장이다. 2021년 미국 <포브스>는 맨유의 시장 가치를 42억 달러(4조7208억원)로 평가했다. 글레이저 가문이 인수했던 2005년 당시 평가액은 약 10억 달러(1조1240억원)이었다. 퍼거슨 감독이 떠난 뒤, 맨유는 세계 최고액 이적료 기록을 경신할 정도로 이적시장에서 주인공 노릇을 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직원 임금에 손을 대지 않았던 거의 유일한 클럽이기도 하다.
# 하여튼 글레이저 가문은 밉다
팬들은 뛰어난 경영 실적보다 글레이저 일가가 실제로 취한 이득에 초점을 맞추며 분노한다. ‘맨유 서포터즈기금’은 글레이저 일가가 금융 비용을 대거나 자기들 호주머니를 채우느라 맨유에서 빼 나간 누계액이 10억 파운드에 달한다고 주장한다. 2021년 기준 맨유는 프리미어리그 20개 클럽 중 유일하게 주주 배당을 실시한다. 수혜자는 당연히 글레이저 가족이다. 최근 글레이저 일가는 보유 지분 약 2%를 처분해 현금화했다. 빌린 돈을 굴려 회사를 인수하고, 빚을 갚고, 돈도 챙기는 기막힌 프로세스다. 손이 닿지 않는 구름 위에서 벌어지는 ‘돈놀이 쇼’가 팬들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다.
현재 맨유의 지주회사인 ‘레드풋볼’은 미국 델러웨어 등록 법인이다. ‘레드풋볼’이 소유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한회사’는 조세회피처인 케이맨제도 등록 법인이다. 덕분에 맨유가 해외 시장 수입은 영국이 아니라 미국 세법에 따라 과세된다. 올드 트래퍼드는 맨체스터에 있지만, 법적 소재지는 영국이 아니라 카리브해 외딴섬이다. 맨체스터에서 태어난 ‘모태 서포터즈’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글레이저 일가의 행태 중 하나일 뿐이다. 쌓이고 쌓인 16년짜리 불만이 슈퍼리그 해프닝을 계기로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5월 2일 맨유와 리버풀 경기 중계에 투입되었던 맨유 레전드 개리 네빌, 로이 킨, 리버풀 레전드 제이미 캐러거는 모두 팬심을 옹호했다. 외국인 자본가, 심지어 비즈니스에 특화된 미국인 구단주에 대해선 이들도 본능적 반감을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맨유의 현재는 글레이저 일가가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글레이저 시대에서 맨유의 시장 가치는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면 맨유의 경영 실적 반등도 예정된 수순이다. 비즈니스적 측면에서 지금 맨유는 아주 잘 굴러가고 있는 클럽이다. 부채비율이 높다고 해서 글레이저 일가가 전력 보강에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도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4~5조원짜리 축구 클럽을 선뜻 살 슈가대디가 있을까. 맨체스터 현지 팬들의 바람이 이루어지기까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글, 그림 = 홍재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