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등번호 특집] 20번의 전설 스탄코비치와 후배 밀린코비치-사비치

축구에서 등번호가 달리기 시작한 건 192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이전까지는 축구에 등번호 자체가 없었다. 그마저도 월드컵에서 처음 도입된 건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였다. 당시엔 고정된 등번호가 아닌 선발 출전하는 선수에게 해당 경기마다 1번부터 11번의 등번호를 달고 출전하는 형태였다.

결국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이르러서야 지금처럼 선수 고유의 등번호를 가지고 경기에 나섰다. 이를 기점으로 등번호는 제각각의 의미를 띄기 시작했다. 몇몇 선수들은 특정 등번호를 통해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월드컵 참가 선수가 22명에서 23명으로 늘어난 건 2002년 한일 월드컵부터이다. 이전까지는 22인으로 월드컵 로스터가 정해져 있었다. 즉 등번호 23번이 등장한 건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그런 관계로 골닷컴에서 제공하는 등번호 특집 칼럼에서 등번호 23번은 제외했다).

상당수의 경우 등번호 1번부터 11번까지는 전통에 따라 주전 선수들이 많이 다는 번호이다. 자연스럽게 12번부터는 백업들이 주로 등번호를 달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특정 스타 플레이어들 중에선 뒷번호를 더 선호하는 경우도 있고, 해당국가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번호도 있다. 혹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유망주 시절에 선배들에게 밀려 뒷번호를 달고 뛰다가 스타덤에 오르기도 한다.

20번은 19번과 마찬가지로 쟁쟁한 선배에게 밀려 10번을 달지 못하는 유망주들이 자주 다는 번호이다. 다만 한국에선 전설적인 수비수였던 홍명보의 영향으로 수비수들이 20번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박성재 디자이너

# 20번의 전설 스탄코비치와 후배 밀린코비치-사비치

대표적으로 선배에게 밀려 대표팀 시작 단계에서 20번을 달고 출전했던 선수로는 세르비아 축구가 자랑하는 플레이메이커 데얀 스탄코비치가 있다.

먼저 스탄코비치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세르비아의 역사를 단편적으로나마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 세르비아는 발칸 반도에 위치한 국가로 1918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체제(구유고)를 유지하고 있었다. 참고로 구유고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그리고 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연방국가이다. 구소련, 체코 슬로바키아 등과 유사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1990년 공산 체제 붕괴(독일 통일과 구소련 해체)와 함께 민주화 운동이 발발하면서 민족 단위로 분리 독립하는 과정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1991년, 슬로베니아 내전과 크로아티아 내전을 겪으면서 유고슬라비아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마케도니아 4개국으로 나뉘었다. 

이어서 1992년, 유럽의 킬링필드라고 불리는 보스니아 내전이 발발했다. 3년 8개월 간의 긴 내전 속에서 마침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보스니아 평화협정에 공식 조인하면서 독립국 자격을 얻었다. 자연스럽게 신유고연방은 2003년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국호를 변경했다.  다시 3년 뒤인 2006년, 몬테네그로가 국민 투표를 통해 독립은 선언했다. 결국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각기 다른 두 개의 국가로 분리됐다.

구유고연방의 해체와 세르비아-몬테네그로를 거쳐 세르비아가 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설명한 이유가 있다. 바로 이 역동의 역사를 거친 인물이 바로 스탄코비치이기 때문이다. 그는 축구사를 통틀어 유일하게 3개의 각기 다른 대표팀(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세르비아)으로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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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탄코비치는 등장부터 화려했다. 1998년 4월 22일, 한국과의 A매치 데뷔전에서 그는 동점골을 넣은 데 이어 역전골까지 넣으며 3-1 역전승을 견인했다. 이러한 활약상을 인정받아 그는 A매치 3경기 출전이 전부였음에도 만 19세의 나이에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엔 동유럽이 배출한 최고의 플레이메이커이자 주장 드라간 스토이코비치가 10번을 달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그는 등번호 20번을 달고 첫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이란과의 개막전에서 팽팽한 무득점 경기가 진행되던 후반 5분경 교체 투입되어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1-0 승리에 기여했다. 이어서 독일과의 2차전에 선발 출전한 그는 선제골을 넣으며 2-2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미국과의 조별 리그 최종전에도 선발 출전해 1-0 승리에 일조했다. 하지만 정작 네덜란드와의 16강전에선 결장했고, 유고슬라비아는 경기 종료 직전 에드가 다비즈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1-2로 아쉽게 패해 탈락했다.

이어진 유로 2000 본선에서 유고슬라비아는 8강에서 또 다시 네덜란드에게 1-6 치욕적인 대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게다가 2002 한일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에서도 러시아와 슬로베니아에게 밀려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이에 유고슬라비아는 베테랑 스토이코비치 체제와 작별을 고하고 스탄코비치 중심으로 팀을 재편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이에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바이-몬테네그로로 개명했다. 세르비아-몬테네그로를 이끌고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참가한 그는 코트디부아르와의 최종전에서 니콜라 지기치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며 선전했으나 정작 팀은 3전 전패를 당하며 조기 탈락의 수모를 겪어야 했다. 특히 아르헨티아와의 조별 리그 2차전에선 0-6으로 치욕적인 대패를 당했다.

다시 2006년 독일 월드컵이 끝나고 세르비아-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나뉘었다. 사보 밀로세비치가 월드컵 탈락과 동시에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자 그의 뒤를 이어 신생 세르비아 주장에 부임했다. 구유고에서 유고슬라바니아로, 다시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그리고 세르비아로 연달아 해체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는 어린 선수들을 이끌고 팀을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본선으로 이끌었으나 독일과의 32강 조별 리그 2차전에서 1-0 승리에도 불구하고 가나와의 개막전(0-1 패)과 호주와의 최종전(1-2 패)에서 모두 1골 차로 아쉽게 패하면서 탈락했다.

이후 스탄코비치는 부상 등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며 많은 경기에 결장했다. 세르비아 역시 스탄코비치의 부재를 드러내며 무너졌다. 실제 그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2012년 5월부터 2012년 11월까지 6개월 사이에 세르비아는 2승 2무 5패의 부진을 보였다. 결국 스탄코비치는 2013년 10월 일본과의 평가전(2-0 승)을 마지막으로 선배 밀로세비치(A매치 102경기)를 넘어 세르비아 역대 A매치 최다 출전 기록(103경기)을 수립하면서 대표팀을 떠났다.

그래도 세르비아는 스탄코비치 없이도 빨리 팀을 추스리는 데 성공했다. 비록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진출엔 실패했으나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에서 아일랜드와 웨일스, 오스트리아 등을 제치고 조 1위로 월드컵 본선 티켓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 러시아 월드컵에서 세르비아의 등번호 20번은 떠오르는 신성 세르게이 밀린코비치-사비치가 물려받았다. 2015년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뛰어난 활약상을 펼치며 브론즈 볼(대회 MVP 3위) 수상과 함께 세르비아의 깜짝 우승에 기여하며 스타 탄생을 알린 그는 소속팀 라치오에서 세리에A 정상급 미드필더로 우뚝 섰다.

하지만 라치오와의 활약과는 별개로 세르비아 전임 감독 슬라보리우프 무슬린은 그를 외면했다. 결국 그는 2018 러시아 월드컵 예선에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무슬린 감독 경질의 단초를 마련했다. 세르비아 축구협회는 지금 한참 주가가 높은 밀린코비치-사비치를 중심으로 공격 축구를 하고 싶어했다. 반면 무슬린은 수비 축구를 고집했다. 이로 인해 무슬린이 경질되고, 믈라덴 크르슈타이치가 새 감독에 부임하면서 그는 주전으로 발돋움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 해 11월 아시아 평가전에서 중국전을 통해 데뷔전을 치른 그는 마치 선배 스탄코비치를 연상시키듯 한국과의 평가전에서 아담 랴이치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며 A매치 첫 득점 포인트를 올렸다(1-1 무). 모로코와 나이지리아로 이어지는 아프리카 팀들과의 올 3월 평가전에선 부상으로 결장했으나 월드컵을 앞두고 치른 칠레와 볼리비아로 이어지는 남미팀과의 평가전에서 모두 45분 이상을 소화하면서 대표팀 내 입지를 넓혀 나가고 있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유벤투스 같은 명문 구단들이 모두 그를 주목하고 있다. 그의 소속팀 구단주 클라우디오 로티토는 밀린코비치-사비치를 영입하려면 2억 유로(한화 약 2530억)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이적료를 내놓아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번 월드컵은 밀린코비치-사비치의 쇼케이스 무대가 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