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서 등번호가 달리기 시작한 건 192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이전까지는 축구에 등번호 자체가 없었다. 그마저도 월드컵에서 처음 도입된 건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였다. 당시엔 고정된 등번호가 아닌 선발 출전하는 선수에게 해당 경기마다 1번부터 11번의 등번호를 달고 출전하는 형태였다.
결국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이르러서야 지금처럼 선수 고유의 등번호를 가지고 경기에 나섰다. 이를 기점으로 등번호는 제각각의 의미를 띄기 시작했다. 몇몇 선수들은 특정 등번호를 통해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월드컵 참가 선수가 22명에서 23명으로 늘어난 건 2002년 한일 월드컵부터이다. 이전까지는 22인으로 월드컵 로스터가 정해져 있었다. 즉 등번호 23번이 등장한 건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그런 관계로 골닷컴에서 제공하는 등번호 특집 칼럼에서 등번호 23번은 제외했다).
상당수의 경우 등번호 1번부터 11번까지는 전통에 따라 주전 선수들이 많이 다는 번호이다. 그 중에서도 10번은 축구사 역대 최고의 선수로 추앙받고 있는 '축구의 신' 펠레의 등장 이래로 에이스의 번호로 불리고 있다. 실제 만 17세의 펠레가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브라질에게 우승을 안기면서 전세계에 충격을 선사한 이래로 펠레를 보고 축구를 하기 시작한 많은 타국의 에이스들이 그의 등번호를 따라 달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10번은 축구에서 에이스의 번호로 자리잡아나갔다.
Getty사실 펠레가 10번을 달게 된 건 우연의 일치였다. 브라질 축구협회가 실수로 1958년 월드컵을 앞두고 등번호를 제출하지 않는 바람에 우루과이 출신 FIFA 직원이 임의대로 브라질 선수들의 등번호를 지정한 것. 즉 우연에 의해 시작한 등번호 10번의 전설이었다.
이번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네이마르(브라질)를 필두로 메수트 외질(독일), 에당 아자르(벨기에), 루카 모드리치(크로아티아), 모하메드 살라(이집트), 하메스 로드리게스(콜롬비아), 사디오 마네(세네갈), 크리스티안 에릭센(덴마크), 에밀 포르스베리(스웨덴), 두산 타디치(세르비아), 유네스 벨한다(모로코), 브라이언 루이스(코스타리카), 헤페르손 파르판(페루) 같은 각국을 대표하는 에이스들이 10번을 달고 출전할 예정이다.

# 에이스 중의 에이스, 선배 마라도나와 후배 메시
이 중에서도 단연 가장 눈길을 끄는 10번의 주인공은 바로 아르헨티나의 에이스 리오넬 메시다. 메시는 포르투갈 에이스 등번호 7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함께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칭해도 무방하다. 에이스 중의 에이스이자 수많은 현 축구 선수들의 우상이다.
메시는 소속팀 바르셀로나에선 챔피언스 리그 우승 4회부터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이하 라 리가) 우승 9회를 비롯해 이룰 수 있는 모든 걸 이루었다. 발롱 도르도 5회 차지하며 호날두와 함께 공동 최다 수상에 빛나고 있다. 라 리가에선 역대 기록이란 기록은 모두 갈아치우고 있는 메시다. 그런 그에게 하나 없는 게 있으니 바로 월드컵 우승이다.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10번들은 모두 팀에 우승을 선사했다. 먼저 1978년 자국 월드컵에서 마리오 켐페스는 6골로 득점왕과 대회 골든 붓(MVP)을 차지하며 아르헨티나에 처음으로 월드컵 우승을 선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23세에 불과했다.

하지만 켐페스의 시대가 채 저물기도 전에 아르헨티나엔 천재가 등장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펠레와 함께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 불세출의 천재 디에고 마라도나이다.
이미 만 16세 때부터 성인 대표팀에서 뛰면서 천재성을 인정받은 마라도나는 1979년 FIFA 청소년 대회(현 20세 이하 FIFA 월드컵)에서 골든 볼(대회 MVP)을 수상하며 아르헨티나에 우승을 안겨주었다. 사실 1978년 월드컵 당시에도 아르헨티나 현지에선 마라도나를 대표팀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대세였으나 명장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는 "아직 너무 어린 선수다. 이제 근육 구조가 갖춰지고 있는 중이다. 만약 월드컵에서 큰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앞으로 이어질 축구 인생 전체를 망칠 수도 있다"라며 거부했다. 이로 인해 마라도나의 월드컵 데뷔는 4년 뒤인 1982년 스페인 월드컵으로 미루어졌다.
아직 대표팀엔 만 27세의 월드컵 영웅 켐페스가 버젓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아르헨티나의 10번은 마라도나였다. 원래 1974년부터 1982년까지 아르헨티나는 선수 이름 스펠링 순서대로 등번호를 배정했으나 마라도나가 10번을 고집해 10번을 달았고, 그 누구도 이에 토를 달지 못할 정도로 그의 재능과 실력은 독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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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나의 첫 월드컵 도전은 다소 아쉽게 마무리됐다. 마라도나 개인의 활약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월드컵 직전에 있었던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하면서 다소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벨기에와의 개막전에 임한 아르헨티나는 0-1로 패했으나 마라도나는 화려한 돌파를 선보이며 천재의 등장을 전세계에 알렸다. 6명의 벨기에 선수들이 마라도나 한 명을 막는 장면이 포착된 사진은 아직까지도 축구 역사에 남는 명장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이어서 헝가리와의 1차 조별 리그 2라운드에서 마라도나는 2골 1도움을 올리는 괴력을 과시하며 4-1 대승을 견인했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엘살바도르와의 조별 리그 최종전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2차 조별 리그에 진출했다(당시엔 총 12개 팀이 4개 조로 나뉘어 2차 조별 리그 끝에 준결승 진출팀을 가리는 형태였다).
벨기에와의 개막전 패배로 1차 조별 리그 조 2위에 그치면서 아르헨티나는 우승 후보 이탈리아(실제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브라질과 함께 죽음의 조에 속했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이탈리아에게 1-2, 브라질에게 1-3으로 패하며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마라도나 역시 라이벌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거친 파울에 시달리다 감정 조절에 실패해 상대 선수에게 발차기를 해 퇴장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래저래 마라도나에겐 아쉬움이 많은 월드컵 데뷔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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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는 1982년 월드컵이 끝나고 메노티를 경질하고 카를로스 빌라르도를 신임 감독에 임명했다. 공격 축구를 구사하던 메노티와는 달리 빌라르도는 실용적인 축구를 구사하면서 아르헨티나를 공격에 있어선 마라도나 원맨팀에 가까운 형태로 구축했다. 마라도나이기에 가능했던 전술적인 시도였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은 마라도나의 월드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과의 개막전에서 홀로 3도움을 올리며 3-1 승리를 견인한 마라도나는 이어진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동점골을 넣으며 1-1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불가리아와의 조별 리그 최종전에서도 마라도나는 1도움을 올리며 2-0 승리에 기여했다.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선 비록 득점포인트(골과 도움)를 기록하지 못했으나 압도적인 개인 기량을 과시하며 1-0 승리에 일조한 그는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 원맨쇼를 펼쳐보였다. 먼저 마라도나는 51분경 그 유명한 '신의 손(헤딩을 시도하다 손으로 골을 넣은 것)'으로 선제골을 넣었다. 이어서 4분 뒤 그는 잉글랜드 선수 6명을 제치는 환상적인 돌파로 추가골을 기록했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의 멀티골에 힘입어 2-1로 승리하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마라도나의 잉글랜드전 2골은 모두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아직까지도 뽑히고 있다. 이어진 벨기에와의 준결승전에서도 그는 홀로 2골을 넣으며 2-0 승리를 이끌었다.
Getty Images마라도나가 연신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활약을 반복하자 결승전 상대인 서독은 당대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중 하나인 로타르 마테우스에게 마라도나 전담 마크를 시키는 강수를 던졌다. 자존심을 버린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덕에 서독은 마라도나를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었으나 정작 다른 아르헨티나 선수들 수비에 실패하면서 먼저 2실점을 허용했다.
이에 프란츠 베켄바워 서독 감독은 공격형 미드필더 펠릭스 마가트를 빼고 공격수 디터 회네스를 교체 출전시키며 더 이상 마테우스에게 마라도나 전담 마크를 시키지 않았다. 이러한 전술적인 변화 덕에 서독은 73분경 칼-하인츠 루메니게의 골에 이어 81분경 루디 푈러가 골을 넣으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엔 마라도나가 있었다. 마테우스의 전담 마크에서 자유를 얻은 마라도나는 경기 종료 6분을 남기고 환상적인 스루 패스를 연결했고, 이를 받은 동료 미드필더 호르헤 부르차가가 천금 같은 결승골을 성공시켰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서독을 3-2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마라도나가 펠레의 뒤를 이어 축구 황제의 대관식에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1986년 월드컵에서 마라도나는 7경기에서 무려 5골 5도움을 올리는 괴력을 과시했다.
Getty Images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도 마라도나는 비록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아르헨티나의 결승 진출을 이끌었다. 하지만 서독과의 결승전에서 2명의 선수가 연달아 툊아을 당하는 수적 열세 속에서 경기 종료 5분을 남기고 다소 미심쩍은 페널티 킥 판정으로 실점을 허용하면서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다.
이후 마라도나는 악몽과도 같은 시기를 보냈다. 1991년, 코카인 양성 판정을 받아 15개월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고,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선 그리스와의 개막전에서 골을 넣고 이어진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선 클라우디오 카니자의 결승골(2-1 승)을 어시스트했으나 도핑 테스트에서 금지 약물 복용 사실이 발각되어 출전 정지를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축구 황제에게 있어 다소 수치스러웠던 마지막 월드컵이었다.
마라도나의 시대가 저물고, 아르헨티나에선 디에고 라토레를 시작으로 아리엘 오르테가와 마르셀로 가야르도, 후안 로만 리켈메, 파블로 아이마르, 카를로스 테베스 등 무수히 많은 제2의 마라도나들이 양산됐다. 하지만 오직 메시만이 마라도나의 진정한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다. 마라도나 본인도 메시를 유일한 후계자로 평가하고 있다.
Getty / Goal메시는 마라도나와 마찬가지로 2005년 20세 이하 월드컵 우승을 견인하며 골든 볼(대회 MVP)을 수상했다. 이어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선 금메달까지 차지하면서 왕도를 걸었다. 하지만 정작 성인 대표팀에선 단 한 번의 우승 트로피도 들어올리지 못하고 있다.
만 18세의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참가한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메시는 교체 선수로 제한된 역할을 수행했으나 세르비아와의 경기에서 1골 1도움을 넣는 등 준수한 활약상을 펼쳤다. 비록 아르헨티나는 독일과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 접전 끝에 패했으나 메시에 대한 기대감은 자연스럽게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이어진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메시는 감독으로 부임한 마라도나의 지도 하에서 특급 도우미 역할을 수행하면서 3도움을 기록하며(한국과의 조별 리그 2라운드에서 2도움을 올렸다) 8강 진출을 이끌었으나 또다시 독일에게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이번엔 0-4 대패였다).
Getty절치부심한 메시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풀이라도 하듯 조별 리그 3경기에서 4골을 넣는 괴력을 과시하며 말 그대로 멱살 잡고 아르헨티나를 16강으로 이끌었다. 동료 공격수들의 극심한 부진으로 인해 메시 홀로 공격을 이끌다시피 하며 조별 리그 3경기 모두 1골 차 신승을 이끌어냈다.
토너먼트에서도 아르헨티나 동료 공격수들은 침묵했다. 자연스럽게 메시는 상대의 집중마크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메시는 스위스와의 16강전에서 무려 키패스(슈팅으로 연결되는 패스)를 8회나 시도하는 괴력을 과시했고, 결국 연장전에 앙헬 디 마리아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1-0 승리를 견인했다. 이어진 벨기에와의 8강전에서도 아르헨티나의 유일한 골은 메시의 패스로부터 시작됐다. 준결승전에선 무득점에 그쳤으나 승부차기 접전 끝에 결승에 올랐다.
이번에도 아르헨티나의 결승전 상대는 또다시 독일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메시의 패스를 중심으로 공격을 전개했고, 전반전에 공격수 곤살로 이과인이 2차례나 득점 찬스를 얻었으나 골을 넣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결국 승부는 연장까지 이어졌고, 마리오 괴체에게 실점을 허용하며 0-1로 패했다. 메시는 골든 볼(대회 MVP)을 수상할 정도로 발군의 기량을 과시했으나 월드컵 3회 연속 독일의 벽을 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제 메시도 어느덧 만 30세에 접어들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전성기에 치르는 월드컵이 될 지도 모른다. 지난 월드컵에선 마지막 순간 고배를 마신 메시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그가 마라도나의 뒤를 이어 월드컵 무대에서 대관식을 치르길 바라마지 않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