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등번호 특집] 15번의 전설 파우캉과 그의 후배 파울리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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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서 등번호가 달리기 시작한 건 192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이전까지는 축구에 등번호 자체가 없었다. 그마저도 월드컵에서 처음 도입된 건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였다. 당시엔 고정된 등번호가 아닌 선발 출전하는 선수에게 해당 경기마다 1번부터 11번의 등번호를 달고 출전하는 형태였다.

결국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이르러서야 지금처럼 선수 고유의 등번호를 가지고 경기에 나섰다. 이를 기점으로 등번호는 제각각의 의미를 띄기 시작했다. 몇몇 선수들은 특정 등번호를 통해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월드컵 참가 선수가 22명에서 23명으로 늘어난 건 2002년 한일 월드컵부터이다. 이전까지는 22인으로 월드컵 로스터가 정해져 있었다. 즉 등번호 23번이 등장한 건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그런 관계로 골닷컴에서 제공하는 등번호 특집 칼럼에서 등번호 23번은 제외했다).

상당수의 경우 등번호 1번부터 11번까지는 전통에 따라 주전 선수들이 많이 다는 번호이다. 그 중에서 15번은 가장 특징을 짓기 어려운 다소 애매한 번호이다. 지난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32개국 중 총 15명의 미드필더와 14명의 수비수(나머지 3명은 공격수였다)가 15번을 나눠가졌다. 어찌 보면 각 팀에서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선수가 울며 겨자먹기로 다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월드컵에서 15번을 단 스타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아마도 15번으로 가장 유명한 선수는 다름 아닌 스페인 핵심 수비수 세르히오 라모스일 것이다. 그는 세비야 선수 시절 동료이자 절친으로 2007년 8월 28일, 만 22세의 어린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안토니오 푸에르타를 기리기 위해 스페인 대표팀에서만큼은 등번호 15번을 고집하고 있다. 하지만 라모스는 아직 현역 선수이기에 이번 글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World Cup Back Number


# 등번호 15번의 전설 파우캉과 그의 후배 파울리뉴

라모스 이전에도 축구사에 큰 족적을 남긴 전설적인 축구 선수가 15번을 달고 활약한 케이스가 있다. 바로 1982년 스페인 월드컵 당시 지쿠와 소크라테스, 토니뉴 세레주와 함께 브라질 황금 사중주로 불리던 파울루 호베르투 파우캉이다(Paulo Roberto Falcao). 

그는 브라질 명문 인테르나시오날 역대 최고의 선수이자 AS 로마 시절 '로마의 8번째 왕'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전설적인 미드필더이다. 콜롬비아 간판 공격수 라다멜 팔카오의 이름이 파우캉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팔카오의 부친인 라다멜 가르시아가 파우캉의 팬이었기에 붙인 이름이었다(팔카오의 풀네임은 Radamel Falcao Garcia Zarate이다).

파우캉은 브라질이 자랑하는 후방 플레이메이커 유형의 미드필더이다. 원래 공격형 미드필더도 소화할 정도로 뛰어난 테크닉과 공격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지쿠와 소크라테스라는 걸출한 공격형 미드필더들이 이미 대표팀에 있었기에 그는 세레주와 함께 수비형 미드필더를 담당했다(당시 브라질의 포메이션은 2명의 수비형 미드필더와 2명의 공격형 미드필더를 배치하는 4-2-2-2였다). 세레주가 수비에 집중한다면 파우캉은 양질의 패스를 전방에 공급하는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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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그가 단순히 공격과 패스에만 재능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는 왕성한 활동량과 정확한 태클로 수비에도 높은 공헌도를 자랑했다. 그의 헌신이 있었기에 브라질이 다소 변칙적인 4-2-2-2 포메이션을 구동할 수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그의 최대 강점은 바로 환상적인 볼 다루기 능력에 기반한 키핑에 이은 패스였다. 다소 느릿하면서도 한 번의 볼 터치에 압박을 들어오는 상대 선수를 제치고 패스를 뿌리는 그의 모습은 어느 정도 현재 스페인 대표팀 후방 플레이메이커 세르히 부스케츠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우아하게 축구를 하는 대표적인 선수였다.

1976년 5월 31일, 만 22세의 나이에 이탈리아와의 평가전을 통해 브라질 대표팀 데뷔전을 치른 그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참가가 유력했으나 대회를 앞두고 부상을 당해 메디컬 테스트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는 바람에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로 인해 그는 다소 늦은 만 28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월드컵 데뷔 무대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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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명실상부한 우승후보 1순위였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브라질은 1차 조별 리그 3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며 파죽지세를 이어갔다(당시는 1차 조별 리그와 2차 조별 리그 형태로 나뉘어서 월드컵 본선이 진행됐다). 파우캉 역시 스코틀랜드와의 1차 조별 리그 2라운드와 뉴질랜드와의 최종전에 연달아 골을 넣으며 3연승에 기여했다.

이어진 2차 조별 리그 1라운드에서 브라질은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3-1 완승을 거두었다. 이 경기에서 파우캉은 세르지뉴 출라파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고, 수비적으로도 아르헨티나 신성 디에고 마라도나를 괴롭혔다. 이에 마라도나는 감정 조절에 실패했고, 경기 종료 5분을 남긴 시점에 브라질 수비형 미드필더 바티스타를 발로 걷어차는 우를 범하며 퇴장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2차 조별 리그 최종전에서 브라질은 이탈리아 대표팀 감판 공격수 파올로 로시에게 해트트릭을 허용하며 2-3으로 패해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브라질이 자랑하던 황금 사중주에서 수비를 담당하고 있는 세레주의 패스 미스로 2번째 실점을 헌납한 게 결정적인 패인으로 작용했다. 비록 파우캉이 68분경 환상적인 왼발 중거리 슈팅으로 동점골을 넣었으나 74분경, 이 경기에서 브라질이 처음으로 허용한 코너킥에서 로시에게 결승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비록 브라질은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으나 파우캉은 활약상을 인정 받아 골든볼(대회 MVP)을 수상한 이탈리아 우승 주역 로시에 이어 실버볼(대회 MVP 2위)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준결승전에도 진출하지 못한 팀에서 실버볼 수상자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외부적으로 브라질 에이스는 '하얀 펠레' 지코였기에 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Paulo Roberto Falcao Brazil

그는 4년 뒤, 등번호 5번으로 갈아타면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이미 만 32세로 베테랑에 해당했기에 주전 자리를 등번호 15번을 물려받은 알레망에게 내준 상태였다. 결국 그는 2경기 교체 출전에 만족해야 했고, 브라질은 프랑스와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 접전 끝에 탈락했다.

이후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클레베르손이 15번을 달고 주전으로 활약하면서 브라질의 통산 5번째 우승에 기여했다. 당시의 활약상을 인정받아 그는 2003년 여름, 잉글랜드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후 부진을 보이면서 축구 팬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다.

이번 월드컵에서 15번의 주인공은 파울리뉴로 낙점됐다. 그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빈민가 출신인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어린 시절 리투아니아로 넘어가 빌뉴스에서 프로 데뷔했고, 폴란드 구단 우치에서 선수 경력을 이어나갔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추위와 인종차별에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토로했다.

결국 힘든 동유럽 생활을 청산하고 만 21세에 브라질로 돌아온 그는 하부 리그 구단 아우닥스 상 파울루와 브라강치누를 거쳐 브라질 명문 코린치안스에 입단했다. 여기서 그는 평생의 은사인 치치와 재회했다. 치치의 지도 아래서 빠른 속도로 성장한 그는 코린치안스와 함께 2011년 브라질 세리에A 우승과 2012년 남미의 챔피언스 리그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에 이어 2012년 FIFA 클럽 월드컵 우승(결승전 상대는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 첼시였다)까지 차지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Paulinho & Tite

코린치안스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그는 2012년 브라질 대표팀에 승선했고, 2013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 컵에 참가해 주전으로 뛰면서 브라질의 우승에 기여했다. 일본과의 개막전에서 골을 넣은 데 이어 우루과이와의 준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결승 진출을 이끈 파울리뉴였다. 이에 많은 명문 구단들이 그를 주목했고, 결국 토트넘이 1700만 파운드(한화 약 243억)의 이적료와 함께 그를 영입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토트넘에서 그는 극도의 부진을 보이면서 악몽과도 같은 시기를 보냈다. 소속팀에서의 부진과는 별개로 대표팀에선 주전으로 중용됐으나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파울리뉴는 크게 눈에 띄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그는 2015년 여름, 다소 젊은 나이인 만 26세에 중국 구단 광저우 에버그란데로 이적하기에 이르렀다. 실패한 선수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이었다.

절치부심한 그는 광저우에서 前 브라질 대표팀 감독 펠리페 스콜라리의 지도를 받으면서 예전의 기량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스콜라리의 뒤를 이어 브라질 대표팀 감독에 치치가 부임하면서 대표팀에서도 전술의 핵심 선수로 자리잡아나갔다.

Paulinho and Scolari - Brazil and Netherlands - World Cup 140712

결국 그는 브라질 대표팀에서의 활약 덕에 2017년 여름, 4천만 유로(한화 약 500억)의 이적료와 함께 스페인 명문 바르셀로나에 입단하는 데 성공했다. 말 그대로 전현직 브라질 대표팀 은사들(스콜라리와 치치) 덕에 승승장구하고 있는 파울리뉴이다.

치치에게도 파울리뉴는 매우 중요한 선수다. 치치의 페르소나(Persona: 연극과 영화에서 쓰는 용어로 감독을 대변하는 대표 배우를 지칭하는 표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그가 2018 러시아 월드컵 남미 지역 예선에서 6골을 넣으며 주전 원톱 공격수 가브리엘 제수스(7골)에 이어 팀내 득점 공동 2위(네이마르와 동률)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분명 파울리뉴의 개인 기량 자체는 위대했던 선배 파우캉에 미치지 못한다. 파우캉은 브라질 역사를 통틀어서도 지지와 함께 가장 위대한 플레이메이커였다. 하지만 적어도 치치 감독의 전술에 있어선 비중만 놓고 본다면 1982년 월드컵 당시의 파우캉보다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치치의 브라질이 성공하기 위해선 파울리뉴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Paulo Roberto Falc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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