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닷컴] 한만성 기자 = 국가 대표급 축구 선수 사이에서는 복용 비율이 매우 잦은 편에 속하는 진통제가 최악의 상황에는 생명에도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돼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대중에는 선수들의 복용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진통제는 이부프로펜(Ibuprofen). 비스테로이드성 진통제인 이부프로펜은 세계도핑방지기구의 금지목록에 포함돼 있지 않다. 이부프로펜은 부상당한 선수에게 일시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근육통, 신경통 등을 제거해줄 뿐만이 아니라 감기, 두통, 생리통에도 효과가 있어 일반 환자에게도 처방되는 의약품이다. 그러나 이부프로펜을 과다 복용하면 위장출혈이나 심장병 위험이 더 커진다. 이 때문에 미국식품의약국은 2009년부터 이부프로펜의 제품 상표에 위장출혈 등 부작용과 관련한 경고 문구 포함을 의무화하기 시작했다.
주요 뉴스 | 맨시티 사례로 보는 EPL의 도핑 관리법
과거 국제축구연맹(FIFA) 수석 의료담당자로 활동한 체코 출신 예지 드보라크 박사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부터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본선에 출전한 모든 선수의 의학 기록을 살펴본 결과 이부프로펜, 혹은 다른 소염진통제를 매일 복용하는 선수가 무려 50%나 됐다고 밝혔다. 즉, 16년에 걸쳐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 중 절반은 통증을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소염진통제를 자주 복용 중이다.
월드컵과 같은 최상위 무대에 나서는 정상급 선수는 대개 최첨단 스포츠 의학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그들 중 대다수는 소속팀은 물론 대표팀에서도 권위 있는 의료진의 관리를 받는다. 그러나 이들마저도 빈번하게 소염진통제를 사용해온 점을 고려할 때, 각국 프로는 물론 하부 및 아마추어 리그에서 활약 중인 선수는 더 열악한 환경에서 부작용의 위험을 간과하거나 의학적 견해가 없이 이부프로펜 등을 복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드보라크 박사는 소염진통제가 금지목록에 포함된 약물은 아닐지라도 선수의 건강에 적지 않은 지장을 줄 만한 성분으로 만들어졌다며 우려를 내비쳤다.
드보라크 박사는 대부분 선수가 소염진통제 복용의 위험성을 모르는 데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소속팀으로부터 압력을 받는 사례도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영국 공영방송 'BBC'를 통해 "축구계에서 소염진통제 복용은 이제 경기의 일부분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완전히 잘못된 풍토가 자리 잡았다. 내가 보는 소염진통제 복용은 약물 복용이다. 우리는 선수들한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가 있다. 정신 차리고, 조심하라고 말이다. 소염진통제는 위험이 없는 약이 아니다. 과자 먹듯이 할만한 약이 아니라는 뜻이다. 소염진통제를 자주 복용하면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진통제 복용의 부작용으로 선수 생명에 지장을 받은 가장 큰 예로는 지난여름 현역 은퇴를 선언한 前 리버풀 수비수 다니엘 아게르가 있다. 탄탄한 신체 조건과 기술까지 겸비한 아게르는 한때 리버풀의 붙박이 주전으로 활약했으나 잦아진 부상 탓에 소염진통제 복용이 갈수록 잦아졌고, 결국 선수 생명은 물론 건강에도 문제가 생겼다. 그는 덴마크 명문 브뢴비에서 활약한 2015년 초 소염진통제를 복용하고 코펜하겐전에 선발 출전했다가 29분 만에 교체됐는데, 드레싱 룸으로 돌아간 후 몸에 이상을 느낀 나머지 어지럼증을 느끼고 순간적으로 기절하며 아찔한 경험을 했다.
아게르는 당시 사건을 떠올리며 2016년 7월 덴마크 일간지 '질란스-포스텐'을 통해 "내 몸이 더는 진통제의 부작용을 견디지 못했다. 나는 선수 생활을 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진통제 복용을 했다. 나중에는 누구보다 진통제 복용이 위험하다는 걸 잘 알게 됐다. 이제 이런 말을 해도 내가 이득을 볼 건 없다. 그러나 다른 선수들이 내 말을 듣고 진통제 복용을 다시 생각해봤으면 한다"고 설명했다.
드보라크 박사는 오는 30일 BBC를 통해 방영될 다큐멘터리를 통해 진통제 복용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는 FIFA에서 근무할 당시 세 차례나 선수의 소염진통제 복용을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단 한 번도 그의 지적이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진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드보라크 박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데만 집중하는" 스포츠 문화가 진통제 복용의 위험을 무마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몇몇 구단은 팀의 성공을 선수의 안전보다 우선시하고 있다며 부상 중인 선수가 압력을 받고 진통제를 복용한 후 후유증에 시달릴 때가 많다고 밝혔다.
과거 잉글랜드 대표팀과 맨체스터 시티에서 활약한 수비수 대니 밀스 또한 선수들이 압력을 받고 소염진통제를 복용한 건 흔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드레싱 룸에서 압력을 받은 선수가 진통제를 복용하고 경기에 나서는 팀을 수없이 봤다. 진통제 복용은 예전부터 널리 퍼진 풍토였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라고 설명했다. 밀스는 차라리 프리미어 리그 등 최상위 무대에서 활약 중인 선수는 의료진의 철저한 관리를 받는 만큼 진통제 복용의 부작용에 시달릴 위험이 적을 수 있지만, 이러한 안전장치가 없는 환경의 하부 리그에서 뛰는 선수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나 정작 잉글랜드에서 선수의 인권 보장을 목적으로 설립된 프로축구 선수 협회(PFA)는 소염진통제 복용이 "큰 문제는 안 된다"며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PFA는 세계도핑방지기구의 금지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성분으로 만들어진 진통제라면 선수의 개인적인 선택은 존중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출전 수당, 활약에 따른 보너스로 금전적인 혜택이 주어지는 선수는 건강을 간과하고 진통제를 복용하고 출전을 감행할 수 있다며 PFA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선수가 구단의 압력을 받거나 충분한 의학 정보도 없이 진통제를 복용한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주요 뉴스 | "그럼 어떤 전술 쓸까?", 슈틸리케의 아무말대잔치
지금까지 진통제 복용 여부를 두고 PFA 측에 공식적으로 항의한 선수는 익명을 요구한 단 한 명뿐이다. PFA의 선수 복지 업무 담당 마이클 베넷은 "허리 부상을 당해 이부프로펜을 복용하고 훈련과 경기 출전을 병행한 한 선수가 항의한 적이 있다. 그는 경기 후 항상 더 큰 문제를 겪어야 했다. 그는 경기에 끝난 후에도 진통제를 복용해야 했다. 그는 구단 의료진이 아닌 개인 주치의의 소견을 들은 후에나 진통제 복용을 줄였고, 나중에는 이를 완전히 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진통제 문제를 제기한 선수는 아직 단 한 명뿐이다. 따라서 아직 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에서는 조만간 운동선수의 진통제 복용을 두고 규정에 큰 변화가 생길 조짐이 보이고 있다. 패럴림픽(장애인 올림픽) 금메달 11회 획득에 빛나는 영국의 휠체어 육상 선수 타니 그레이-톰슨은 최근 진통제 복용 관련 내용이 포함된 운동 선수의 안전과 복지와 관련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영국 정부는 이를 검토한 후 조만간 도핑 규정 변경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