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닷컴, 조호르바루(말레이시아)] 프로스포츠에서 돈과 성공은 한 몸이다. 돈이 많으면 이기고, 강해지려면 돈이 필요하다. 유럽 빅5 리그 챔피언들이 전원 전 세계 매출 10위 안에 포진한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돈의 힘은 너무 커서 오용, 남용에 따른 부작용도 심하다. 말라가, 도르트문트, 리즈유나이티드, 발렌시아처럼 금력의 저주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사례가 적지 않다. 결국 많은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축구 클럽의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
조호르다룰탁짐(JDT)은 말레이시아 2대 도시인 조호르바루를 연고로 하는 클럽이다. 동남아에서 돈깨나 쓰는 클럽 정도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홈경기장에는 스타벅스와 서브웨이 매장이 있고, 훈련장에서는 유럽 지도자들이 정열적으로 일한다.
상시 운영 중인 스타디움투어, 유니폼 가슴에 새겨진 나이키의 ‘스우시’ 마크, ‘이케아’와 콜라보 마케팅 등 유럽 빅클럽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 JDT에선 일상처럼 실현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말레이시아 현지에서 탈(脫)동남아 클럽 JDT를 직접 들여다봤다.
# 벼락부자로 출발하다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 내려 예약해 놓은 택시에 올라탔다. 인천-조호르바루 직항 노선은 아직 코로나19 팬데믹 전으로 복항되지 않았다. 여행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도로가 한산한 새벽 시간대라면 창이 공항에서 조호르바루 어느 곳이든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11월 2일 저녁 술탄이브라힘스타디움에서는 말레이시아컵 준결승 2차전이 열렸다. 홈팀 JDT는 페락 원정 1차전에서 이미 4-1로 승리한 상태다. 이날 JDT는 페락을 8-1로 대파해 4년 연속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다양한 낯섦 중에서 필자는 경기장 안팎의 관리 상태에 눈이 갔다. 놀라울 정도로 깨끗했다. 청결함이 솔직히 비현실적인 수준이었다. 경기 전 만난 ‘플래시수칸’의 모흐드 피르다우스 조하리 기자가 그 비밀을 풀어줬다.
“TMJ는 지저분한 걸 정말 싫어한다. 경기가 없는 날에도 JDT의 홈경기장과 클럽하우스는 항상 티끌 하나 없이 관리된다.”
JDTTMJ는 ‘툰쿠 마코타 오브 조호르’의 이니셜이다. ‘조호르 왕세자’라는 뜻이며 그가 JDT의 오너다. 2013시즌 막바지에 TMJ는 조호르FC(당시 명칭)의 홈경기를 참관했다. 당시 클럽은 파산 위기에 빠진 상태였다. 말레이시아 축구계 관행대로 구단주 타이틀만 유지한 당시 오너는 축구에 무관심했다. 절망에 빠진 홈 서포터즈에게 TMJ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TMJ, 도와주세요!”, “TMJ, 우리를 살려주세요!”
그날 서포터즈의 애절한 구호가 드디어 술탄의 아들에게 닿았다. 얼마 후, TMJ는 조호르FC를 인수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JDT 팬인 샤키르 시단(31, 항공업)은 “그날 구호를 듣고 나서 TMJ가 ‘이제는 내가 나서야 할 때’라고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인수 결정 뉴스를 들으면서 우리 모두 엉엉 울었다”라고 회상한다.
TMJ는 클럽 대개조 작업에 착수했다. 클럽 명칭은 ‘조호르 다룰 탁짐’으로, 서포터즈 명칭은 ‘보이스 오브 스트레이츠(Boys of Straits)’로 각각 바뀌었다. 압도적 자금력을 앞세워 JDT는 말레이시아 리그의 최고 스타들을 매집했다. 인수로부터 1년 만에 JDT는 말레이시아 리그를 제패했다.
# 인적 쇄신을 통한 ‘진짜’ 클럽 만들기
JDT를 백조로 탈바꿈시킨 진짜 비결은 돈이 아니라 축구 산업에 대한 통찰력이었다. TMJ는 축구 클럽이 어떻게 운영돼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유럽 현지 전문가들을 초빙해 클럽 발전 로드맵을 새로 짰다. 말레이시아 최초로 클럽 내에 유소년 아카데미가 설치되었다. 현재 JDT는 12세부터 성인까지 1~4군으로 운영된다.
훈련 환경도 싹 바뀌었다. TMJ는 발렌시아와 업무 협약을 통해 유럽 선진 코칭 시스템을 고스란히 수입했다. 협약 만료 후에도 발렌시아에서 날아왔던 인력은 전원 JDT에 남아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다. 훈련장에 들어가면서 홍보 책임자 비제이 빅은 필자에게 “이곳에서는 스페인어와 영어만 들린다. 코치들이 전부 스페인과 아르헨티나 사람들”이라며 웃었다.
JDT훈련장은 고압산소치료기(산소 챔버), 무중력 트레드밀 등 첨단 장비를 갖췄다. 주치의 상주는 물론 스포츠영양사가 선수별 맞춤 식단을 제공한다. 홈경기장 피치와 동일한 품종의 천연잔디가 2개 면이 있었고, 우천 시를 대비한 반실내 훈련장도 설치되어 있다. 빅은 “지금 홈경기장 건너편에 새로운 훈련장을 짓고 있다. 천연잔디 10개 면이 들어설 예정이다. 아시아에선 최고 시설이 되지 않을까 싶다”라고 말했다.
JDT의 글로벌 인력은 일반 행정직도 마찬가지다. 현 대표이사 알리스테어 에드워즈는 호주 국가대표 출신 스포츠 행정가다. 현역 은퇴 후, 스포츠경영학 학사 및 경영학 석사를 각각 취득했고, 호주 연령대 국가대표팀과 A리그 클럽에서 지휘봉을 잡기도 했다. 유학파 구단주와 호주인 사장 덕분에 직원들 모두 영어에 능통하다. 나이키, 위블로, 유니세프, 이케아 등 글로벌브랜드와의 성공적 협업도 이러한 글로벌 문화가 있기에 가능했다.
JDT# 동남아 유일의 나이키 프리미엄 파트너
현재 홈경기장인 ‘술탄이브라힘스타디움’은 2020년 개장했다. 3만 5천 석으로 규모는 아담하지만, 관중 동선과 내부 시설 편의성, 첨단 조명 시설, 최상의 상태를 보장하는 잔디 노면까지 일품이다. 축구 경기장 전문 웹사이트 ‘stadiumDB.com'은 이곳을 ‘2020년 올해의 스타디움’으로 선정했다.
JDT 홈경기장에서는 스타디움투어가 상시 운영된다. 클럽 측은 일반 투어는 물론 숙박과 항공까지 포함한 패키지 상품도 판매 중이다. 특별 제작한 험머 리무진 탑승도 술탄이브라힘스타디움이 제공하는 호스피탈리티 상품 중 하나다. 경기장에는 서브웨이, 스타벅스, KFC 등 글로벌 F&B 브랜드가 입점해 있다.
JDT현재 JDT는 동남아에서는 유일하게 나이키의 프리미엄 계약을 체결한 클럽이다. K리그 클럽들처럼 기성품 커스터마이징이 아니다. 브랜드가 처음부터 직접 디자인하는 ‘찐 파트너십’이다. 지난 시즌에는 유니세프가 JDT를 찾아와 파트너십이 이루어졌다. 에드워즈 사장(호주)은 “이제는 글로벌브랜드가 먼저 찾아온다. 기업들은 ‘좋은 것’, ‘좋은 일’에 동참하길 원한다. 빠르게 성장하는 JDT 옆에 자신들의 로고를 놓고 싶어한다”라고 설명한다.
성공적 스폰서십 비즈니스의 원동력은 JDT의 영광과 존재감이다. 현재 JDT는 10년째 말레이시아 챔피언 타이틀을 지키고 있다. 2015년에는 동남아 클럽으로서는 최초로 AFC컵(AFC챔피언스리그 아래 단계)을 차지했다. 2022시즌에는 창단 첫 AFC챔피언스리그 16강행에도 성공했다. 말레이시아 국내에서는 이미 전국적 지지를 받고, 최근 일본에도 팬 지부가 운영된다.
JDT축구 클럽에서 팬그룹 확보는 필수 요소다. JDT의 콜리더는 정직원이다. 경기장 내에 공식 클럽숍과 별개로 팬들이 운영하는 팬숍도 설치되어 있다. 국내 팬들에게 ‘유급 콜리더’는 생소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의 프로스포츠 역시 응원단장과 치어리더를 고용한다. FC서울도 홈경기마다 치어리딩팀을 투입한다. 최근 JDT 서포터즈인 ‘B.O.S’는 5천 명을 돌파했다. 콜리더를 제외한 서포터즈는 팬들이다. 국내 프로야구를 생각하면 된다. 현장의 열정적 서포팅도 브랜드들이 스폰서십 계약을 원하는 이유 중 하나다.
# 독과점의 장단점
말레이시아 무대에서 JDT의 적수는 없다. ‘미디어 디지털 조호르’의 파르한 카이르 기자는 “JDT의 라이벌은 JDT”라고 단언했다. 막바지에 다다른 2023시즌 JDT는 24전 23승 1무로 우승을 확정했다. 남은 3경기에서 JDT는 2년 연속 ‘무패 우승’을 목표로 한다.
JDT의 독과점은 국가대표팀 운영에서 문제로 드러나기도 한다. 김판곤 감독은 국가대표팀 소집에 애를 먹는다. JDT 소속 선수 대부분이 국가대표인 탓에 선수 차출 과정에서 마찰이 생기기도 한다. FIFA 캘린더에 없는 AFF챔피언십(통칭 ‘스즈키컵’)에는 JDT가 선수 선발을 거부했다. 조하리 기자는 “말레이시아 내에서는 국가대표팀이 이기면 ‘김판곤 감독 덕분’, 패하면 ‘JDT 때문’이라는 인식도 있다”라고 말한다.
골닷컴물론 장점도 있다. JDT의 선진적 클럽 운영은 말레이시아 축구계에서 좋은 본보기가 된다. 유소년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클럽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JDT는 정기적으로 선수의 컨디셔닝은 물론 부상 치료, 재활 등의 노하우를 리그 내에서 공유한다. 에드워즈 사장은 “내년에 말레이시아 U16 대회가 신설된다. 말레이시아 리그의 수준이 높아져야 JDT도 발전할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
# 슈퍼리치 축구광
조호르바루 현지에서 만난 인터뷰이들은 모두 TMJ를 찬양했다. JDT가 왕세자에게 근사한 간판일 수는 있겠지만, 그정도까지 ‘귀한’ 시간을 투자하겠느냐는 의구심이 들었다. 필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런데 당신은 TMJ와 대화해본 적은 있는가?”라고 캐물었다. 에드워즈 사장은 “아내보다 더 자주 이야기한다”라고 대답했다.
“한번은 홈에서 6-1로 이겼고, 경기는 밤 11시 반에 끝났다. 그런데 갑자기 TMJ가 회의를 소집했다. 감독, 임원들 그리고 나까지 술탄 궁전으로 들어가 12시 반에 회의를 했다. TMJ는 세트피스 완성도에 문제를 제기했다. 축구선수인 내가 들어도 타당한 지적이었다.”
홍보 책임자 빅도 매일 TMJ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는다. 빅은 “TMJ 집무실이 바로 윗층이다(헤드쿼터 3층). 수시로 내게 전화를 걸어댄다”라고 말한다. 필자는 “만약 말레이시아축구협회에서 영입 제안이 온다면?”이라고 묻자 빅은 “나는 무조건 JDT에서 일할 거다. 여기에서 일하는 게 훨씬 배울 게 많다”라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B.O.S’ 운영진인 닉 무사니프(23, 회사원)는 “올해 초에 TMJ가 우리를 궁전으로 초청했다. 그 자리에서 TMJ와 팬들은 클럽의 향후 계획, 발전 방안, 팬들이 원하는 바 등에 관해 진지하게 의견을 나눴다”라고 말했다. “TMJ는 무슨 문제든 즉시 해결하는 성격이다. 또 한 번 세운 계획은 반드시 실행한다.”
# JDT 스토리가 흥미진진한 이유
아쉽게도 K리그(특히 울산) 팬들 사이에 JDT는 악명이 높다. 2022시즌 조호르바루에서 진행된 AFC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일정이 말썽이었다. 당시 울산은 훈련장, 경기장, 이동 거리 등에서 푸대접받았다고 하소연했다. 올 시즌 들어 개선된 상황도 울산 팬들의 노여움을 달래진 못했다. 설상가상 울산은 이번에도 JDT에 패했다. K리그 챔피언이 1년 사이에 이곳에서만 같은 팀에 3경기를 내리 패한 것이다.
한국프로축구연맹말레이시아 현지에서 직접 확인한 JDT는 그저 ‘K리그와 악연지간’만으로 인식되기 아까운 클럽이었다. 그곳에서는 유럽 축구의 선진 시스템이 작동 중이었다. 술탄이브라힘스타디움은 현대적 기능성과 최적의 관람 환경을 제공한다. 양팀 선수들을 위한 전용 라운지와 실내 워밍업 시설, 치료실 등을 완비했다. TMJ는 “실패에 대한 변명 여지를 모두 없애줄 것”이라고 천명했고, 그 결과는 클럽의 톱클래스 운영으로 나타났다.
이번 취재에서 만난 모든 이에게 꿈을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딱 하나였다. AFC챔피언스리그 우승이다. TMJ는 JDT를 인수한 지 10년 만에 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선진 클럽으로 만들었다. 막대한 부를 적재적소에 영리하게 분산 투자한 결과다. 지금처럼 노하우가 시간과 함께 축적된다면, 그 꿈이 망상은 아닐 것 같다.
글 = 홍재민
사진 = 홍재민, 조호르다룰탁짐(JDT), 한국프로축구연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