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에서 “폭설이 내린다”라는 연락이 왔다. 2주 전 잡았던 주말 계획은 그렇게 연기되었다. 향기로운 사찰 밥에 대한 기대도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자연이 변덕을 부리면 인간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서울은 나처럼 연기를 선택할 수 없었다. 지난 라운드 울산전 이후 선수단 내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했다. 선수들은 물론 안익수 감독을 포함한 코칭스태프까지 20명이 확진되었다. 살아남은(?) 지도자가 김진규 코치와 김순호 2군 코치 둘뿐이었다. 서울은 울산-포항 경기처럼 연기를 요청했지만 한국프로축구연맹은 규정을 근거로 거절했다. 어린 선수들까지 박박 긁어모아 겨우 17인 엔트리를 채웠다. 엔트리 고민을 묻자 김진규 감독대행은 “크게 문제가 없었다”라고 대답했다. “선수가 17명밖에 없었으니까.”
서울월드컵경기장에 도착했다. 지인이 “이런 경기, 뭐 볼 게 있다고 왔느냐?”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글쎄, 뭘 보러 왔을까. 이날 첫선을 보이는 하이브리드 잔디 구경하러? 최근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잔디는 하이브리드로 교체했다. 국가대표팀 경기 때마다 반복된 문제 지적에 시설관리공단이 이제야 반응한 결과였다. 기자석에 앉았다. 시선을 왼쪽 서울 서포터즈 스탠드에서 시작해 중간 메인스탠드를 훑고 오른쪽 원정팀 구역까지 돌렸다. 새 잔디 구경은 3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급조된 서울은 제주를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다. 통역자 확진으로 히카르도는 꿀 먹은 벙어리 상태로 K리그에 데뷔했다. 히카르도 옆자리에는 공격수 김신진이 힘겹게 버텼다. 좌우 풀백에 있는 양유민과 권성윤도 얼떨떨해 보였다. 서울은 전반전 10분과 26분에 연달아 실점을 내줬다. 원망하는 이는 없었다. 경기력을 탓하는 팬도 없었다. 서울 팬들은 사정을 알기에 탄식보다 선수들을 격려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미소가 보였다. 아마도 너털웃음일 것이다.
현장에는 감정의 방향성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즐겨야 할지, 상황을 한탄해야 할지, 누구의 어떤 플레이를 기대해야 할지를 확실히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굳이 한 가지 감정선을 꼽자면 원망이다. 지난주부터 서울은 연맹이 미웠다. VAR 판정 논란과 코로나19 연기 거부가 연달아 들이닥쳤으니까. 연맹의 결정을 둘러싼 전언들은 각기 달라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줘야 할지 헷갈렸다. 현장에서 만난 연맹 관계자도 원칙 준수의 당위성과 서울 측의 섭섭함 사이에 낀 것 같았다. 불운 또는 혼돈이 이렇게 겹치면 모두 난감해진다.
육성응원이 금지된 탓에 서울 수문장 백종범의 콜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2001년생 골키퍼는 자신의 K리그 데뷔가 이런 모양새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서울은 전진하지 못했다. 압박에 견디며 전방을 살피는 능력, 중원에서 패스를 받는 포지셔닝, 최전방에서 공간을 만드는 움직임, 그 어느 것도 없었다. 모든 선수가 눈앞 상대와 힘겨루기에 급급했다. 준비하느라 했겠지만 제주의 베스트 전력은 쉽게 대응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보는 내가 다 답답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암의 공기 중 불만 함유량은 계속 높아졌다.
한국프로축구연맹후반전이 되자 더 많은 것이 사라졌다. 햇볕이 없어졌고 경기 템포가 실종되었다. 서울의 정체에 제주의 경기력까지 덩달아 떨어졌다. 새 잔디 위에서 양쪽 선수들이 자주 미끄러졌다. 그래도 잔디가 패이지 않는 걸 보니 내구성이 좋다는 설명이 맞긴 하나 보다. 경기 종료 10분 전, 백종범이 진성욱과 충돌한 뒤 일어나지 못했다. 황성민이 급하게 교체 투입되었다. 코로나19로 주축들이 격리되고, 그나마 출전한 선수는 다쳐서 나오고, 스코어는 0-2로 뒤지는 상황이라니 서울 팬들은 무척 서글프다. 백종범의 머리를 감싼 붕대가 처량했다.
후반 43분 서울 입단 후 3년 만에 두 번째 출전을 기록한 이승재가 제주의 왼쪽을 뚫었다. 혼전을 관통한 이승재가 밀어준 볼을 K리그 데뷔생 박호민이 추격골로 연결했다. 경기가 끝나기 일보 직전이 돼서야 꽉 막혔던 상암의 목청이 처음 터졌다. 이 한 골을 보기까지 수만 리를 돌아온 기분이다. 서울은 1-2로 패했다. 하지만 박호민의 K리그 데뷔골만으로도 홈 팬들은 이겼을지 모른다.
상암에서 경기 결과에 의미를 두는 이는 제주 선수단과 원정 팬들뿐이었다. 물론 서울처럼 제주도 오늘 이후 며칠간은 열심히 자가진단키트를 사용해야 할 처지다. 김진규 감독대행은 “(전염 가능성이 있어)제주에 미안하다”라고 말했고, 남기일 감독은 마음 씀씀이에 감사를 표시했다. 서울 팬들은 악전고투의 끝에 기립 박수를 보냈다. 마치 90분을 버텨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일부 서포터즈는 연맹에 항의하는 플래카드를 경기 전과 후에 내걸었다. 연맹으로서는 육성응원을 금지하는 방역조치가 고마울지도 모르겠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여전했다. 인구 1천만 도시에서 벌어진 올 시즌 첫 K리그1 경기는 많은 이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채로 끝났다.
한국프로축구연맹글, 그림 = 홍재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