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o BentoMiguel Riopa/Stringer

토대는 튼튼한 벤투호, 변속 기어를 탑재해야 완성된다

[골닷컴] 한만성 기자 = 무려 20년 전, 2002 한일 월드컵에서 ‘골든보이’라는 별명을 얻은 안정환은 사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원한 ‘토털 축구'를 구사하는 데 요구되는 능력을 충족하는 공격수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최전방에서부터 강하게 상대를 압박하려면 필요한 체력은 안정환의 최대 약점으로 꼽혔다. 이 때문에 히딩크 감독은 한국이 폴란드, 미국을 차례로 상대한 한일 월드컵 초반 두 경기에서는 안정환을 선발 명단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을 마친 후 출간된 자서전을 통해 안정환을 최종명단에 포함한 이유를 설명하며 그는 팀의 ‘변속 기어(change gear)’ 같은 역할을 해줄 선수였다고 밝혔다.

자동차의 변속 기어란 변환 조작으로 다양한 속도를 낼 수 있는 톱니바퀴를 뜻한다. 안정환은 강한 체력을 요구하는 ‘토털 사커'에 썩 어울리는 자원은 아니었지만, 한국이 월드컵에서 만날 세계적 강호를 상대로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특유의 창의성과 탁월한 기술로 경기 흐름을 바꿔주는 선수였다는 게 히딩크 감독의 설명이었다. 실제로 안정환은 미국전과 이탈리아전 극적인 골로 이와 같은 기대에 부응했다.

현재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한국은 지난 29일(한국시각) 두바이에서 UAE를 상대한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 마지막 경기를 0-1 석패로 마무리했다. 이는 벤투 감독 체제의 한국이 1년 만에 당한 패배다. 두바이 원정에서 패한 한국은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을 무패로 마감하는 데 실패했고, 불과 며칠 전 이란을 꺾으며 차지한 A조 1위 자리를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무엇보다 한국은 UAE 원정에서 패하며 노출한 약점은 변속 기어의 부재다. 벤투 감독이 상대의 성향에 따라 경기에 준비하는 전술적 틀을 만드는 능력은 한국 대표팀 역사상 히딩크 감독 이후 최고 수준이라는 점을 증명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준비한 전술적 틀이 경기 도중 발생하는 변수 탓에 틀어지면 이에 대응하는 능력에서 이따금씩 약점을 노출하고 있다.

벤투 감독은 4년째 한국 대표팀을 이끌며 튼튼한 토대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한국 대표팀은 벤투 감독 부임 전까지는 생소했던 90분간 발생하는 모든 순간을 통제하는 계획적인 경기 운영을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지향하는 ‘점유율 축구’는 단순히 볼을 소유하는 데만 중점을 두고 있을 뿐 효과적이지 않은 건 물론이며 한국 대표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여론은 곧 뒤집혔다.

한국의 월드컵 최종예선 종료 직후 FIFA 랭킹

베어벡, 허정무 체제 - 17승 19무 6패

52위 - 2006 독일 월드컵 직후

48위 - 2010 남아공 월드컵 최종예선 직후

조광래, 최강희 체제 - 19승 7무 8패

44위 - 2010 남아공 월드컵 직후

43위 - 2014 브라질 월드컵 최종예선 직후

슈틸리케, 신태용 체제 - 27승 7무 7패

57위 - 2014 브라질 월드컵 직후

51위 - 2018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직후

벤투 체제 - 28승 10무 5패

57위 - 2018 러시아 월드컵 직후

29위 - 2022 카타르 월드컵 최종예선 직후

한국 대표팀은 시간을 거듭하며 벤투 감독의 일관성 있는 전술을 확실하게 이해하게 됐고, 지난 10월부터 차츰 경기력이 정상 궤도로 올라섰다. 그러면서 한국의 높은 볼 점유율을 가리켜 ‘볼 소유 축구'로 대변됐던 벤투 감독의 축구가 인상적인 경기력으로 이어지자 여론도 이를 ‘볼 공유 축구'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을 30계단 가까이 끌어 올린 인물 또한 역사상 벤투 감독이 처음이다.

심지어 한국은 무려 11년 만에 이란을 꺾은 지난 24일 경기에서는 후반전 점유율이 48%로 밀렸으나 오히려 전반전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2-0 완승을 거뒀다. 이는 벤투 감독이 점유율을 맹신하는 축구를 구사한다는 지적이 100% 사실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한 기념비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문제는 경기가 벤투 감독이 준비해놓은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갔을 때다. 한국이 카타르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치른 10경기 중 공격력이 가장 답답했던 경기는 9월 이라크전(0-0 무)과 레바논전(1-0 승), 그리고 지난 29일 UAE전(0-1 패)이었다. 이 세 경기에서 벤투호가 노출한 공통점은 상대의 단단한 수비에 막혀 중앙 지역을 통해 공격을 전개하지 못하자 단순한 패턴으로 측면에서 크로스를 올리는 상황이 반복된 흐름이다.

벤투호 최종예선 경기별 크로스 시도 횟수

25회 - 이라크전(9월 홈)

36회 - 레바논전(9월 홈)

19회 - 시리아전(10월 홈)

16회 - 이란전(10월 원정)

17회 - UAE전(11월 홈)

15회 - 이라크전(11월 원정)

22회 - 레바논전(1월 원정)

23회 - 시리아전(2월 원정)

14회 - 이란전(3월 홈)

30회 - UAE전(3월 원정)

특히 UAE전에서는 그동안 벤투호의 중원 사령관 역할을 맡은 황인범(25)이 부상으로 빠진 공백이 크게 나타났다. 황인범은 이번 최종예선 A, B조 12개국의 모든 선수를 통틀어 파이널 서드(공격 진영)로 진입한 패스를 가장 많이 기록한 선수다. 황인범이 빠진 한국은 이란전은 무난하게 치러냈지만, UAE 원정에서는 중원에서 실마리를 풀지 못하며 좌우 풀백 김진수와 김태환이 띄워주는 크로스 위주로 공격을 시도했다.

이처럼 한국은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 경기에서는 공격 패턴이 지나치게 단순해지는 약점을 노출하고 있다. 벤투 감독이 그동안 한국 대표팀을 이끌고 선보인 경기력을 되짚어본다면, ‘안정적이고 무난하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린다. 그러나 월드컵에서는 안정적이고 무난하게만 경기를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벤투 감독에게는 세계적 수준의 상대를 만났을 때 경기 도중 발생할 변수에 대응할 만한 변속 기어가 필요하다.

벤투 감독 부임 후 한국이 선제골을 헌납한 경기 결과

0-1 패 - 카타르전(2019년 아시안컵 8강)

2-2 무 - 조지아전(2019년 평가전)

0-3 패 - 브라질전(2019년 평가전)

0-3 패 - 일본전(2021년 평가전)

2-1 승 - 레바논전(2021년 아시아 2차 예선)

0-1 패 - UAE전(2022년 아시아 최종예선)

한국은 벤투 감독 체제에서 지난 4년간 43경기를 치렀으나 선제골을 헌납하며 끌려가본 경험 자체가 많지 않다. 또한, 한국이 그나마 상대에 먼저 실점한 여섯 경기에서 승부를 뒤집은 건 단 한 차례밖에 되지 않는다. 즉, 벤투 감독의 한국은 아직 변수에 대응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필요한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한 팀이다.

벤투 감독은 지난 4년간 한국 대표팀을 이끌며 어느 전임 감독보다 더 튼튼한 토대를 세워놓았다. 그러나 UAE 원정을 통해 아직 팀이 완성된 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났다. 이제 벤투호에 필요한 마지막 퍼즐 조각은 단단하게 만들어놓은 토대 위에 탑재해야 하는 ‘변속 기어'다.

글=한만성

자료=OPTA, SofaScore

사진=Get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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