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닷컴] 강동훈 기자 = 올여름 번번이 영입에 실패하면서 전력 보강이 생각만큼 이뤄지지 않았던 토트넘이 이적시장 마감을 앞두고 드디어 새로운 플레이메이커를 데려왔다. 주인공은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갖춘 차세대 미드필더로 평가받는 사비 시몬스(22·네덜란드)다. 시몬스는 손흥민(33·로스앤젤레스 FC)의 뒤를 이어 ‘에이스’를 상징하는 등번호 7번을 배정받았다.
토트넘은 30일(한국시간)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시몬스를 영입하게 돼 기쁘다. 국제이적증명서(ITC)와 워크 퍼밋(취업 허가)을 받아 모든 절차를 마쳤다”면서 “시몬스는 등번호 7번을 단다”고 발표했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토트넘은 라이프치히와 이적료 6000만 유로(약 975억 원)에 셀온 조항(추후 선수가 이적할 때 벌어들인 이적료 수익 일부를 원소속팀에 주는 계약 조건)을 덧붙여 구단 간 합의를 맺었고, 계약기간은 기본 5년에 연장 옵션 2년이다.
토마스 프랑크 토트넘 감독은 “시몬스를 영입하게 돼 정말 기쁘다. 그는 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환영하면서 “시몬스는 젊지만 경험이 풍부하고, 지난 몇 년간 최고 수준에서 많은 경기를 치렀다. 10번과 왼쪽 측면 공격수 위치에서 뛰면서 골과 도움을 기록하고, 또 수비를 뚫고 동료에게 기회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입증했다. 좋은 일원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시몬스는 “(토트넘에 합류하게 돼서) 정말 기쁘고 빨리 경기를 뛰고 싶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것이 이뤄졌다”고 벅찬 소감을 전한 후 “토트넘은 정말 훌륭한 팀이고, 감독님을 만났을 때 이곳이 저에게 딱 맞는 곳이라는 걸 바로 알았다. 팀에 활력을 불어넣을 뿐만 아니라, 끈기와 규율도 불어넣겠다. 팀과 팬들을 위해 승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을 전했다.
당초 시몬스는 올여름 토트넘과 같은 런던을 연고로 하는 ‘라이벌’ 첼시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아왔고 개인 합의까지 맺으면서 첼시 유니폼을 입는 듯했다. 그러나 첼시가 라이프치히와 구단 간 합의에서 쉽사리 간극을 좁히지 못하면서 협상이 중단됐다. 이런 가운데 플레이메이커, 이른바 ‘10번 역할’을 맡을 선수가 절실했던 토트넘이 시몬스 영입에 착수했다.
실제 토트넘은 제임스 매디슨이 한국 투어에서 오른쪽 무릎 전방십자인대가 파열되면서 수술을 받아 현재 장기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고, 지난 5월 오른쪽 무릎 슬개골 부상으로 수술을 받으면서 전열에서 이탈한 후 여전히 재활 단계에 있는 데얀 쿨루셰프스키는 복귀 시점이 불투명한 상태다. 일각에선 쿨루셰프스키가 내년에야 돌아올 거로 보고 있다.
토트넘은 특히 올여름 두 차례나 영입에 실패한 아픔이 있는 만큼 이번엔 반드시 영입하겠다는 의지 속 발 빠르게 움직였다. 토트넘은 앞서 노팅엄 포리스트와 비밀 바이아웃(방출 허용 최소금액) 조항 관련해 법적 분쟁을 피하고자 모건 깁스화이트와 개인 합의를 이루고도 영입을 포기했고, 에베레치 에제와는 세부 사항 조율만 남겨뒀지만 ‘북런던 라이벌’ 아스널이 ‘하이재킹(다른 구단이 영입을 추진하는 선수를 중간에 가로채는 것을 의미)’하면서 무산됐다.
토트넘은 라이프치히가 요구한 이적료 6000만 유로를 단번에 제안하면서 원칙적으로 구단 간 합의를 맺었고, 이후 시몬스와 개인 합의에 돌입했다. 시몬스가 여전히 첼시행에 미련이 남아 있어 설득하는 게 관건이었지만 토트넘은 시몬스에게 최고 대우를 약속하는 등 파격적인 조건을 앞세워 마음을 돌려세웠고 결국 영입에 성공하면서 스쿼드의 경쟁력을 강화했다.
시몬스는 중앙 미드필더는 물론이고 측면과 공격형 미드필더까지 소화할 수 있는 다용도 미드필더다. 탈압박과 축구 지능이 뛰어나고, 연계 능력을 비롯해 플레이메이킹 능력도 빼어나다. 특히 그는 ‘라 마시아(바르셀로나 유소년 시스템)’에서 성장하던 시절 ‘넥스트 이니에스타’로 평가받을 정도로 많은 기대를 모은 유망주였다.
2021년 파리 생제르맹(PSG)에서 프로 데뷔한 시몬스는 주전 경쟁에서 밀려 이듬해 PSV 에인트호번으로 떠났다. 이후 잠재력이 만개한 그는 1년 만에 PSG로 돌아왔다. 당시 PSG는 바이백 조항(합의된 금액을 지급하면 복귀시킬 수 있는 계약 조건)을 발동시켰다. 다만 루이스 엔리케 PSG 감독의 구상에 포함되지 못해 이듬해 라이프치히로 향한 후 정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