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가드한국프로축구연맹

[김형중_비욘더게임] ‘데뷔’ 린가드가 보여준 가능성, 그리고 19년 전의 기억

[골닷컴] 여태껏 K리그 역대 최고 외국인 선수는 단연 라데 보그다노비치라고 믿어왔다. 물론 데얀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데니스나 ‘샤샤’ 드라쿨리치를 꼽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10대 시절이었던 1992년부터 1996년까지 4년 간 보아온 포항 스트라이커 라데의 폭발적인 모습은 마흔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뇌리에 깊게 박혀 있다.

이들은 비교적 어린 나이에 한국으로 건너와 성공가도를 달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대로 화려한 커리어로 이름을 날린 후 한국 무대에 입성한 선수를 꼽으라면 로버트 아킨슨이나 도도, 마차도, 키키 무삼파 등을 말할 수 있다. 2002 월드컵 터키 대표로 우리와 맞붙었던 데파이 외잘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2024년, 이들보다 더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하는 선수가 K리그 무대에 입성했다. 2010년대 들어 구단들의 긴축 재정으로 이름값 있는 선수들의 영입이 쉽지 않았던 K리그 판에 오랜만에 나타난 빅네임이다. 바로 제시 린가드다.

린가드는 영국 체셔 카운티의 워링턴이란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워링턴이 영국 북부의 대도시 맨체스터와 리버풀 사이에 위치해 있어, 린가드는 유년 시절 자연스럽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스 팀에 들어가 성장할 수 있었다. 프로에 데뷔한 린가드는 맨유 소속 무려 232경기를 뛰며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이 되었다.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나서 6경기 1골 2도움 맹활약을 했다. 커리어만 보면 K리그 역대 외국인 선수 중 가장 화려함을 자랑하는 선수가 아닐까 싶다.

린가드 맨유Getty Images

2월 9일 서울의 2차 전지훈련부터 팀에 합류한 린가드는 아직 한국 생활이 한 달도 되지 않은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수준이다. 10여 일 동안의 가고시마 훈련을 빼면 한국 땅에서 생활한 지 2주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2일 열린 광주FC와의 개막전부터 교체로 출격하며 약 20분 간 그라운드를 누볐다. 경기 전 김기동 감독은 “몸 상태가 60~70%라고 하더라. 솔직히 출전시키고 싶지 않다”라며 정상 컨디션에 오를 때까지 기다리고 싶은 마음을 나타냈다.

그러나 서울은 광주에 한 골을 뒤졌고, 시계 바늘은 후반 30분을 넘어가려고 했다. 김기동 감독은 결단을 내렸고 린가드를 전격 투입했다. 경기장에 들어선 린가드는 한 템포 빠른 공간 패스를 시도했고, 곧이어 첫 번째 슈팅도 때렸다. 또 오른쪽 측면에서 수준급의 크로스로 일류첸코의 헤더를 돕기도 했다. 득점까지 연결되진 않았지만 서울의 이날 찬스 중 가장 위협적이었다. 경기 막판에는 강한 태클로 경고를 받기도 했다. VAR 판독이 이루어졌지만 카드 색깔이 바뀌진 않아 홈 개막전 출전 가능성도 이어갔다. 몸 상태를 생각하면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활약이었다.

이날 광주축구전용경기장에는 7805명의 관중이 들어오며 광주 구단 홈 개막전 역대 최다 기록을 썼다. 경기 티켓은 판매 개시 2분 30초 만에 매진되었다. 지난 시즌 광주가 워낙 잘해 올 시즌도 큰 기대감에 팬들이 몰린 이유도 있지만 린가드 효과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상대 선수나 감독도 궁금해하는 것을 보면 프리미어리그 출신 스타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경기장을 찾은 팬들도 꽤 될 것으로 보인다.

린가드의 플레이를 직접 보고 싶은 축구팬들이 광주에만 있는 것은 아닐 거다. 서울은 2라운드 인천유나이티드전과 3라운드 제주유나이티드전을 홈에서 치르고, 4라운드는 강원FC 원정을 떠난다. 시즌 초반 경기에서 린가드가 골 맛이라도 본다면 홈 팀을 떠나서 경기장을 찾는 팬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커지리라 예상된다. 광주 현장을 취재하고 집에 돌아오니 내일 모레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딸 아이마저 린가드가 경기 출전한 것을 아는 마당에, 축구팬이라면 그의 플레이를 '직관'하고 싶은 마음이 매한가지일 듯하다.

사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경험한 적 있다. 2002 월드컵 성공 이후 스타 플레이어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진 시절 박주영이라는 괴물 신인을 맞이했다. 청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를 거쳐 2005년 서울에 입단한 박주영은 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이미 프로에 오기 전 20세 이하 대표팀에서 '중국 농락 골' 등으로 맹활약하며 축구 천재라는 별명을 얻은 때였다. 서울에서도 그는 두 경기 만에 데뷔골을 터트리며 눈도장을 찍었고, 4월 중순부터 4경기 연속골을 쏘아 올리는 등 연일 득점 행진을 펼쳤다. 정규리그에서는 해트트릭이라는 기염을 토했고 팬덤은 신드롬으로 발전했다. 이는 서울에만 그치지 않았고 원정 경기에서도 박주영을 보기 위한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야말로 전국구 스타였던 셈이다.

린가드 데뷔전골닷컴

광주에서의 개막전에서는 린가드 신드롬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프리미어리그 클럽 중에서도 우리에게 친숙한 맨유 출신이란 점, 특유의 제스처와 세레머니에서 나오는 타고난 스타성 등은 소속팀에 그치지 않고 국내 축구팬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가능성이 크다. 컨디션을 끌어올려 경기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하면 그 속도는 더 빨라질 수 있다.

린가드가 한국 무대에서 성공한다면 그 의미는 남다를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빅네임이 K리그에 입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고, 구단 입장에선 투자를 하면 그 이상을 얻을 수 있다는 하나의 모범 사례로 남을 수 있다. 이제 막 뚜껑을 열었고 조금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K리그 흥행의 시기와 맞물린 린가드의 출현은 2024년 한국 축구산업에 순풍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글 = 김형중

사진 = 한국프로축구연맹, Getty Images, 골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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