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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닷컴 명예의 전당: '축구 황제' 펠레

"베토벤이 음악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나는 축구를 위해 태어났다."

에드손 아란테스 두 나시멘투, 펠레로 더 잘 알려진 소년은 태어난 순간부터 위대한 선수가 될 운명이었다. 그는 브라질의 유명 공격수였던 월데마르 제 브리투에게 발굴돠어 산투스에 입단한다. 제 브리투는 그때부터 펠레가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리라고 전망했다.

15세의 나이에 산투스 데뷔전을 치른 펠레는 첫 경기에서부터 코린치안스 산투 안드레를 상대로 골을 터트려 은퇴할 때까지 무려 1281골을 득점했다. 16세 때 펠레는 이미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이후로 펠레는 9년 연속으로 득점왕을 차지해 은퇴할 때까지 총 11번의 득점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1281골 중에 친선 경기에서 넣은 골까지 포함된 게 아니냐, 리그의 수준이 낮았던 건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그럼에도 펠레의 기록은 범접하기도 어렵다. 한 시즌에 100골을 넘긴 적도 두 번이나 있고, 50골 이상 넣은 것도 15번이다. 브라질의 역대 최다 득점자이자 인터컨티넨탈컵 최고의 선수가 바로 펠레였다. 그는 브라질 리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코파 아메리카까지 모든 대회의 득점왕을 차례로 차지했다.

펠레의 우승 경력은 어마어마하다. 브라질 리그 여섯 차례, 주 대회 우승만 10차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두 차례, 인터컨티넨탈컵 두 차례, 월드컵 세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여기에 1959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에서부터 1970 월드컵 골든볼까지 개인상도 휩쓸었다.

그러나 펠레는 우승과 골이 전부인 선수가 아니었다. 그가 팀과 축구계 전반에 끼친 영향은 통계로만 평가할 수 없다. 조세 안드라데, 주세페 메아차, 스탠리 매튜스, 알프레드 디 스테파노 같은 세계적인 스타들이 존재했지만, 펠레야말로 진정한 축구 황제이자 전 세계적인 슈퍼스타였다.

산투스와 브라질 대표팀 소속으로 펠레는 수많은 투어 경기를 치르며 가는 곳마다 경기장을 꽉꽉 채웠다. 1967년에는 나이지리아 정부와 반군이 펠레의 경기를 보기 위해 휴전을 선언했을 정도다. 1970년대 중반 뉴욕 코스모스에 진출하자 미국의 평균 관중이 80% 가까이 증가했다.

브라질 대표팀 동료였던 클로두알두는 "어떤 나라에 가면 사람들이 펠레를 만져보고 싶어하고, 키스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는 펠레가 지나간 자리에 입을 맞췄다"고 밝혔다.

과거에는 선수들이 한 포지션만을 전문적으로 소화했는데, 펠레는 디 스테파노와 함께 '토털 축구'의 선구자로 활약했다.

1966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잉글랜드 대표팀의 주장이었던 보비 무어는 "펠레는 내가 본 중 가장 완벽한 선수다. 양 발을 모두 잘 쓰고, 공중전도 강하고, 빠르고, 몸싸움도 강하다. 개인기로 수비를 제칠 수도 있었고, 빠른 발로 수비를 따돌릴 수도 있었다. 키가 크지도 않았는데 경기장에 들어서면 거인 같았다. 신체 균형도 완벽했고, 시야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평가했다.

펠레가 진정한 위대한 선수로 발돋움한 것은 역시나 월드컵 무대였다. 가린샤, 디디, 잘마 산투스, 바바 등 훌륭한 선수들을 보유한 브라질 대표팀에서 펠레는 17세에 불과하던 1958년에 등장했다. 10번 유니폼을 입은 그는 웨일스와의 8강전에서 결승골을 터트리더니 프랑스와의 준결승전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브라질의 5:2 승리를 이끌었다. 결승전에서도 펠레는 두 골을 터트리며 스웨덴을 5:2로 꺾는 데 힘을 보탰다. 자국에서 연 1950 월드컵에서 우루과이에 패해 우승을 놓쳤던 슬픔을 씻어내는 순간이었다.

1958 월드컵에서 펠레는 역사에 남을 장면 두 개를 만들어냈다. 첫 번째는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가슴으로 공을 받아놓고 상대 수비를 따돌린 뒤 발리 슈팅으로 골을 터트린 장면이고, 두 번째는 우승이 확정된 뒤 지우마르와 포옹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린 장면이었다.

1970 월드컵에서도 펠레는 명장면을 연출했다. 잉글랜드와의 맞대결에서는 고든 뱅크스 골키퍼의 기적적인 선방을 이끌어냈고, 체코와의 경기에서는 중앙선 부근에서 시도한 로빙 슛을 선보였으며, 이탈리아와의 결승전에서는 총알과 같은 헤딩 슛으로 브라질의 4-1 승리를 이끌었다.

결승전에서 펠레와 맞섰던 이탈리아의 수비수 타르치시오 부르니치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펠레도 뼈와 살로 이뤄진 똑같은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틀렸다"고 밝혔다.

펠레는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세 번 이상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선수로 남아 있다. 1962 칠레 월드컵에서는 대회 대부분 부상 탓에 활약을 펼치지 못 한 채로 우승만 경험했던 게 사실이다. 1966 월드컵에서는 불가리아와 포르투갈 수비수들의 거친 반칙에 시달려 브라질의 조별 라운드 탈락을 지켜봐야 했다.

그대로 대표팀에서 은퇴할 수도 있었지만, 펠레는 1970 멕시코 월드컵에 돌아와 최고의 역사를 썼다. 마리우 자갈루 감독이 이끌던 브라질은 자일지뉴, 카를로스 알베르투, 토스탕, 제르손, 히벨리누와 같은 전설적인 선수들과 함께 우승을 향해 거침 없이 나아갔다. 당시 브라질이 보여준 것은 전무후무한 축구이자 '조가 보니투' 그 자체였다.

펠레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가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브라질에서만 보냈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당시 남미 리그의 수준을 오해한 것이다. 1960년대에는 남미 리그가 유럽 리그보다 뛰어났다. 당시에는 유럽에 진출하는 선수도 거의 없었고, 브라질 정부는 펠레를 국보로 지정하고 레알 마드리드나 유벤투스로으 이적을 막았을 정도다.

산투스에서 펠레는 페페, 쿠티뉴와 함께 최고의 삼각편대를 구성했다. 1962 인터컨티넨탈컵에서 에우제비우가 이끌던 벤피카를 종합전적 8-4로 꺾었을 정도로 대단했다. 펠레는 두 경기에서 5골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고, 다음 해 인터컨티네탈컵에서도 체사레 말디니의 AC 밀란을 상대로 두 골을 넣으며 타이틀을 지켜냈다.

펠레가 산투스에서 발휘한 영향력을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산투스는펠레가 입단하기 전까지 강호도 아니었고, 1955년 이전에는 주 대회에서 한 차례만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펠레와 함께 브라질을 넘어 세계 최고, 역대 최고의 팀 중 하나로 꼽히게 됐다.

경기장 안팎에서 펠레의 존재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블룸버그'의 평가에 따르면 펠레라는 브랜드 가치가 일 년에 2500만 달러의 가치를 창출한다고 한다. 펠레는 선수 생활 초창기부터 정치가들의 관심을 받았고, 나중에는 브라질의 체육부 장관과 UN과 FIFA의 홍보대사까지 역임했다.

이러한 활동에도 펠레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디에고 마라도나의 숙적으로만 기억되고, 가난을 이겨내고 자랐으면서 자신의 부리를 잊었다고 비난받는다. 실제로 브라질에서 대중적으로 더 많은 사랑을 받는 선수는 펠레가 아닌 가린샤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펠레 같은 선수는 없었다. 그는 축구라는 스포츠를 넘어선 존재였고, 경기 내적으로 '황제'라는 칭호를 차지하는 데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았다. 펠레가 골닷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