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역대 베스트 50인... 1위는 찰튼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축구종가 잉글랜드에는 그동안 무수히 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있었습니다. '세계인의 축구 네트워크' GOAL.com은 잉글랜드 역대 베스트 50인의 축구 선수들을 선정해보았습니다. 대망의 1위는 '잉글랜드 축구계의 전설' 보비 찰튼 경입니다.

GOAL.com 선정 英 역대 베스트 50인... 46위는 인스
GOAL.com 선정 英 역대 베스트 50인... 41위는 퍼디난드
GOAL.com 선정 英 역대 베스트 50인... 36위는 합굿
GOAL.com 선정 英 역대 베스트 50인... 31위는 비어드슬리
GOAL.com 선정 英 역대 베스트 50인... 26위는 콜린 벨
GOAL.com 선정 英 역대 베스트 50인... 21위는 빌리 라이트
GOAL.com 선정 英 역대 베스트 50인... 16위는 롭슨
GOAL.com 선정 英 역대 베스트 50인... 11위는 앨런 볼
GOAL.com 선정 英 역대 베스트 50인... 10위는 쉴튼
GOAL.com 선정 英 역대 베스트 50인... 9위는 리네커
GOAL.com 선정 英 역대 베스트 50인... 8위는 에드워즈
GOAL.com 선정 英 역대 베스트 50인... 7위는 키건
GOAL.com 선정 英 역대 베스트 50인... 6위는 그리브스
GOAL.com 선정 英 역대 베스트 50인... 5위는 피네이
GOAL.com 선정 英 역대 베스트 50인... 4위는 뱅크스
GOAL.com 선정 英 역대 베스트 50인... 3위는 매튜스
GOAL.com 선정 英 역대 베스트 50인... 2위는 무어


1위 보비 찰튼(Robert Bobby Chalton) 1937/10/11~

대표팀 경력 : 106경기 49골
소속구단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프레스턴, 왓포드

보비 찰튼은 잉글랜드 축구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다. 1960년대 그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으며 스포츠 정신과 페어 플레이의 상징이었다. 그는 잉글랜드 축구의 전도사이자 불멸의 기록을 남긴 인물이기도 했다.

찰튼은 세 번의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 유러피안 컵 우승, 월드컵 우승을 경험했으며 잉글랜드와 유럽에서 모두 올해의 축구 선수로 선정된바 있다. 게다가 맨유와 잉글랜드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한 선수이기도 하다.

하지만 찰튼을 가장 특별하게 만드는 건 바로 그가 맨유라는 클럽이 위대한 구단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초를 쌓았다는 사실이다.

끔찍한 뮌헨 참사에서 살아남은 찰튼은 두고두고 ‘왜 나는 살아남았을까?’라는 의문을 떨쳐버리지 못하면서도 맷 버스비 감독과 함께 맨유를 재건했다. 엄청난 불행을 우아하고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점에서 그는 목록의 꼭지점에 오를 자격이 충분하다.

버스비 감독은 찰튼을 두고 "그보다 더 유명한 축구 선수는 없었다. 그는 선수이자 인간으로서 완벽 그자체였다."라고 평했다.

또한 잉글랜드 대표팀의 감독이었던 알프 램지는 "그는 위대한 선수이다. 보비 찰튼은 단순한 공격수가 아니라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찰튼은 그야말로 축구를 하기 위해 태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어머니 씨세는 지역 광부들 축구 모임의 일원이었으며 할아버지를 비롯해 네 명의 삼촌은 프로 선수였다.

그 중 한명이 뉴캐슬의 전설적인 포워드 재키 밀버른이었다. 씨세는 축구를 사랑했으며 자식들에게 헌신적으로 축구를 가르쳤다. 그녀의 두 아들 바비와 잭이 축구 선수가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보비는 어린 시절 뉴캐슬의 팬이었으나 맨유에 입단하면서 ‘버스비의 아이들’의 일원이 되었다. 맨유는 1955-56 시즌에 리그 우승을 했으며 다음 시즌 유러피안 컵에서 4강까지 올라갔으나 레알에게 패했다.


'버스비의 아이들' 시절의 젊은 보비 찰튼
 

1956년 가을,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자신과 동명을 가지고 있는 찰튼과의 경기에 데뷔전을 치른 찰튼은 이 경기에서 두 골을 넣으며 화려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는 그 해 맨유와 함께 리그 우승 메달을 목에 걸었으며 FA컵 결승에도 출장했으나 패하면서 아쉽게도 더블에는 실패했다.

1957-58 시즌 맨유는 유러피안 컵 8강에서 찰튼의 두 골에 힘입어 레드 스타를 꺽고 다시 한번 4강에 올랐다. 하지만 1958년 2월 6일 뮌헨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는 비극이 일어난다. 비행기가 두동강이 나면서 찰튼은 의자에 묶인 채로 날아갔다.

해리 그렉과 빌 폴크스는 부상자들을 비행기에서 끌어냈는데 찰튼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의 부상은 머리의 열상과 쇼크뿐이었으며 그는 가장 먼저 병원에서 퇴원했다. 7명의 선수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으며 찰튼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던컨 에드워즈는 병원에서 사망했다.

버스비 감독이 심각한 부상에서 돌아오자 20세의 찰튼은 팀의 재건에 핵심인물이 되었다.

뮌헨 참사가 있고 두 달후에 찰튼은 역시 시즌 첫 경기에서 골을 넣으며 화려하게 복귀전을 장식했다. 5월 그는 FA컵 결승에 다시 올랐으나 볼튼에게 패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 당시 그의 포지션은 왼쪽 윙이었으나 점차 중앙으로 이동하면서 센터 포워드 역할을 맡게 되었고 현재 많은 축구팬들도 그를 공격수로 기억하고 있다.

버스비 감독은 팀이 다시 우승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5년 정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정확하게 5년 뒤인 1963년, 맨유는 레스터 시티를 무찌르고 FA컵 우승을 한다.

다음 시즌 찰튼과 데니스 로, 그리고 조지 베스트의 삼총사는 환상적인 활약으로 리버풀에 이어 2위를 차지했고 1964-65 시즌에 마침내 우승메달을 되찾았다.

찰튼은 1958 월드컵에서는 뛰지 못 했으나 1962년에는 주전이 되었으며 1966년 잉글랜드에서 열린 월드컵에서는 핵심인물이 되어있었다.

환상적인 골을 만들면서 승승장구하던 찰튼과 잉글랜드는 준결승에서 포르투갈과 마주치게 되는데 이 경기에서 찰튼은 최고의 활약을 펼치면서 두 골로 팀의 2-1 승리를 이끌었다.


포르투갈과의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골을 넣는 찰튼 

결승 상대였던 서독은 찰튼을 막기 위해 당시 촉망받는 유망 수비수였던 프란츠 베켄바워를 투입했다. 하지만 결국 잉글랜드는 연장 접전 끝에 첫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찰튼은 잉글랜드 올해의 선수와 유럽 올해의 선수에 이어 월드컵 최우수 선수의 영예마저 안게 된다.

리그 우승을 한 덕분에 맨유는 유러피안 컵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들은 4강까지 거침없이 진격했으나 다시금 벨그라데를 마주치게 되었고 결국 종합 2-1의 스코어로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1966-67 시즌 다시 우승을 차지하면서 맨유는 다시 한번 유럽 정상에 도전하게 되었다. 하이버니안 발레타, FC 사라예보, 그리고 고르니크 자브르제를 연파하면서 4강에서 레알을 만나게 되었는데 찰튼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올해는 맨유의 해가 될 것이다."라면서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데니스 로가 부상으로 결장한 힘든 가운데서도 레알을 꺾은 맨유는 홈인 잉글랜드 웸블리 구장에서 에우제비우의 벤피카와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벤피카는 그때까지 4번이나 결승에 올라 그 중 두 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던 강팀이었다. 반면에 맨유는 결승에 오른 첫번째 잉글랜드 구단이었다.

결승이 벌어지기 1주일 전 찰튼은 지미 그리브스가 세웠던 대표팀 최다골 기록인 44골을 깨는 데 성공했다. 기분좋게  결승전 출전한 맨유의 주장 찰튼은 후반 시작과 함께 정확한 헤딩으로 맨유의 선취점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벤피카도 81분에 극적인 동점골을 만들며 경기를 연장전으로 끌고 갔다. 연장전에서 베스트가 환상적인 개인기로 골을 만들었고 브라이언 키드가 세번째 골을, 그리고 찰튼이 승부에 쐐기를 박는 4번째 골을 성공시키며 뮌헨 참사 10년만에 그들은 유러피안 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 업적으로 버스비 감독은 기사 작위를 받았다.


벤피카전 우승이 확정되자 기뻐하는 찰튼 

다음 시즌에도 맨유는 유러피안 컵 4강에 올랐으나 그 후 버스비 감독이 은퇴하자 팀은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은 찰튼에게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있다. 서독과의 리턴매치에서 알프 램지 감독은 전반에만 2-0으로 앞서자 4강을 위해 지친 찰튼을 아껴두기 위해 그를 뺐다.

하지만 찰튼이 빠지자 그를 전담마크하던 베켄바워의 족쇄가 풀려났고, 자유롭게 공격에 가담한 베켄바워는 추격골을 성공시켰고, 이에 힘입은 서독은 우베 젤러의 동점골과 함께 경기를 연장으로 끌고 갈 수 있었다. 결국 서독은 '득점기계' 게르트 뮐러의 결승골에 힘입어 3-2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면서 1966년 월드컵 결승전 패배에 대한 달콤한 복수에 성공했다.

찰튼은 1972-73 시즌을 마치고 정든 맨유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가 이적한 다음 시즌 맨유는 강등당하고 말았다. 이것만 봐도 맨유에서의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찰튼은 맨유에서 758경기에 출장해 247골을 넣었다. 그의 출장기록은 라이언 긱스에 의해 2008년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아쉽게도 깨지고 말았다. 하지만 찰튼의 대표팀 49골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1974년, 프레스턴으로 이적한 찰튼은 그 곳에서 선수 겸 감독직을 맡았으나 그 역할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곧 그만두게 되었다. 2년간의 프레스톤 생활을 마치고 워터포드로 이적한 그는 1976년, 39살의 나이로 마침내 공식적으로 선수 생활 은퇴 의사를 공식 선언했다.

그 후 그는 몇가지 사업을 하면서 영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축구 학교를 세웠다. 1984년 그는 맨유의 이사가 되었으며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그는 1986년 알렉스 퍼거슨 감독을 데려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94년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2009년 4월에는 UEFA 미셸 플라티니 회장이 찰튼의 공로를 치하해 최초의 UEFA 회장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현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인 파비오 카펠로는 최근 찰튼에 대해 "그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레알 마드리드의 전설적인 공격형 미드필더)를 연상케 하는 미드필더였다. 디 스테파노와 상당히 흡사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던 그는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공수를 모두 담당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그는 환상적인 축구 선수였다"며 찰튼과 같은 선수가 현 잉글랜드 대표팀에 있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이제는 고인이 됐지만, 과거 찰튼의 팀 동료이자 맨유의 상징적인 존재였던 조지 베스트 역시 찰튼에 대해 "난 그보다 더 쉽게 수비수를 제치는 선수를 결코 본 적이 없다"며 칭찬한 바 있다.


우승과 수상경력

월드컵 우승 1966
1부 리그 우승 1956-57, 1964-65, 1966-67
FA컵 우승 1963
유러피안 컵 우승 1967-68
체리티 쉴드 우승 1956, 1957, 1965, 1967

유럽 올해의 선수 1966(2위 1967, 1968)
FWA 올해의 축구선수 1966
PFA 메리트 상 1974
UEFA 회장상 2009


Did you know?

찰튼은 1996년과 2000년 맨체스터 올림픽 유치를 위한 홍보 위원을 맡은 바 있다. 또한 그는 잉글랜드 대표팀 축구 박물관 명예 회장이기도 하다.


맨유의 첫 유러피안 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찰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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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AL.com Editorial Team / 김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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